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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녕 쌩글삶글 Feb 20. 2019

논산시민이 세운 기민중학교와
심암리 애국지사기념비

- 3·1운동100주년기념 기획시리즈(3) 강경3차시위와 심암리 이근석

1950년 3·1 철창동지회기념(뒷줄 왼쪽에서 3번째가 이근석 선생)


지난 해 12월 19일 채운면 심암1리에서 ‘애국지사 기념공원 준공 제막식’이 있었다. 심암1리 마을회관 옆 애국지사 쉼터에 3·1운동 애국지사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이 일은 국가보훈처에서 해준 것도 아니고, 논산시가 알아서 챙겨준 사업도 아니다. 


심암1리는 2018년 희망마을선행사업을 통하여 마을에서 배출된 3·1애국지사 4인의 업적을 기리는 3·1애국지사 기념공원과 함께 기념비를 세우고자 뜻을 모았다. 4인은 송재기와 이봉세, 이근석, 이근오인데, 송씨를 제외한 셋은 전의이씨 일가친척들이다. 


그 뜻을 기념비 제막식으로 이룬 날, 사회는 심암리 강정현 이장이 맡았고, 유족대표 인사는 이봉세 선생 유족 이종목 씨가 하였다. 이근석 선생의 후손인 전 기민중학교 이희로 교장은 작년 가을 세상을 떠난 후의 제막식이다. 

           

심암리 농사꾼들이 들고 일어남


1919년 강경만세운동 3차시위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당시 상황을 윤석일 강경역사문화연구원장의 기록을 중심으로 따라가 보자. 

1919년 3월 20일, 농사를 짓던 채운면 심암리 주민들이 강경 옥녀봉에서 500명이 만세를 불렀다. 상시장을 통과할 때 시위 군중은 1000명으로 늘어났다. 이 독립운동은 이근석이 3월 이후 수차례 3·1운동 소식을 듣고, 또한 매일신보를 보고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심한 데서 시작되었다. 3월 16일 이근석의 집에서 이근석, 송재기, 이봉세, 이근호와 협의하고 그 곳에서 17~18일 이틀 동안 태극기 300개(~500개)를 만들었다. 


 3월 20일 장날, 이들은 심암리와 옆동네 화정리 주민 70여명을 규합하여 강경으로 갔다. 오후 5시경 이들은 옥녀봉에서 군중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옥녀봉에서 윗시장으로 내려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시위에서 주동자들이 체포되었다. 이들 중 이근태와 유치만은 논산헌병대로 압송되어 태 60도를 맞고 방면되었다. 주동자 4인은 공주 지방법원 재판에 회부되어 다음 형량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송재기(26세/ 징역 1년 6월)

이근석(22세/ 징역 1년 2월)

이봉세(21세/ 징역 1년) 

이근오(19세/징역 1년) 


100년이 지난 후 뭉친 동네사람들


100년이 지난 후, 이런 역사를 알고 자랑스럽게 여긴 마을 주민들은 애국공원조성기금을 시작하였다. 420평을 4,200만원에 구입하기까지 어떤 이는 300만원에서부터 생활이 어려운 이는 20만원..... 정성에 정성을 모았다. 


심암1리는 2017년도에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주관하는 농촌현장포럼을 실시하여 마을발전계획서를 수립하였다. 그 주요 내용 중 하나가 마을에서 애국지사가 4명이 배출된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마을가꾸기를 실천하겠다는 것이었다. 다음해인 2018년 행정의 지원없이 애국지사 쉼터조성 부지를 매입하여 마을회관 부지로 등기이전을 완료하였다. 이렇게 되자 시와 도도 나서서 3천만원을 보태 기념비를 세울 수 있도록 조력한 경우이다. 


심암리는 기념비에서 그치지 않고 기념관 건립을 위한 주춧돌을 놓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주민주도의 마을만들기를 권장하고 있는 가운데 심암리도 “2020년 마을만들기 자율개발공모사업(5억원)”을 공모해놓은 상황이다. 그 결과는 2월말 도심사와 3월 농림축산식품부 심사를 거쳐 7~8월경 발표될 예정이다. 농촌현장포럼 이수마을, 희망마을선행사업 실시마을로서 신청자격이 충분할 뿐 아니라 내실이나 명분도 뚜렷하므로 선정 가능성 높게 전망하고 있다. 신청 사업 주요 내용은 애국지사기념관, 애국정원, 문패제작, 애국지사생가터 안내판 등이다. 


기민중학교 논산시민의 학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격언이 “꿈은 이루어진다”로 쉽게 풀어서 회자되는 지금, 논산의 역사와 함께 해온 심암리 민초들의 이야기는 해방 전후에도 기적 같은 현실로 꿈틀댔다. 심암리 4인방 중의 하나인 이근석 선생에게 있어서 교육(敎育)은 간단 없는 꿈이었고, 그 꿈은 오직 의지(意志)와 시민의 조력으로 일구어낸 논산판 기적이기 때문이다. 


이근석 선생은 정부에서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근석 선생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선생이 설립한 기민중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대교동에서 현재의 지산동으로 학교를 이전하는 과정에서 학교재단은 바뀐 상황이다. 기민중학교의 설립자 이근석 선생의 뒤를 이어 이희로 교장이 학교를 운영하였다. 얼마전 화성으로 이사가 장남과 살고 있던 이희로 교장은 작년 가을 타계하였고, 큰 사위가 시내에서 한내과(한성필 원장)를 한다고 알려준다. 이재호 사회교사는 좀 오래된 일이라며 정년 퇴직한 원만희 선생님(역사)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1950년대 대교동 기민중

“기민중학교는 논산시민학교입니다.” 원만희 원로교사의 초성이다. 논중은 공립학교요 대건은 천주교 재단에서 세운 미션스쿨이다. 기민중학교는 법인이나 재력가가 아닌, 일개인이 ‘교육을 통한 독립’이라는 굳은 심지(心地)로 고군분투 설립한 희귀한 사례이다. 


해방 전에도 문맹퇴치를 위해 학원을 운영하였던 선생이 해방 후에는 도청을 찾아가 일제가 쓰던 창고를 빌려달라고 한 모양이다. 그 창고를 어찌어찌 양도받아서 필요한 대로 개조하여 고등공민학교를 열고 무료 성인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자신이 공부를 많이 한 엘리트도 아니었다. 우기리3구 도양골 서당에서 안선생으로부터 한학을 수학한 정도이다. 


학교 운영에는 논산 지역 유지와 학부모들의 후원이 컸다고 한다. 학교가 운동장이나 화장실 등의 여건이 불비하자 80년대 들어서 이전을 결정하는 시점이 되었다. 이때 기민중학교 재단이사장은 박대관 박외과원장였는데, 거금의 이전 비용을 논산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당시 대전에 있던 건설업계통의 재단으로 넘기게 된다. 그때 이사였던 고려병원 최의규 원장이 나서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는 원만희 원로교사(83세)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들린다. 


2018년도 기민중학교 교원사진

재단은 비록 바뀌었지만 건학이념과 전통은 그대로이다. 무엇보다도 민족사학으로서의 정신은, 기민중학교 이름 자체에 알알 박혀 있다. 기민, 기독교(基督敎) 민주주의(民主主義)의 약칭이다. ‘기독교 하나님의 사랑으로 민주주의를 꽃피우자’는 건학정신은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교훈으로 새겨져 있다. 논산시민의 사랑으로, 민초의 저력으로 낙토(樂土; 유토피아)를 일구고자 했던 이근석 선생의 발자취를 정확히 따라가기 위하여 원만희(역사), 이재호(사회) 두 교사에게 글로 의뢰하였다. 오래된 기억이고 친척도 아니어서 한계가 있다는 전제로 두 분의 원고를 받았다. 원만희 선생과 인터뷰하고 한성필 원장(이희로 교장의 큰 사위)의 증언과 오래된 사진, 몇몇 사료를 토대로 이근석 선생의 일대기를 재구성해본다. 


- 이진영 기자             

 

이근석선생님과 부인 강정의 여사


이근석 선생과 기민(基民) 정신


이근석(李根奭) 선생은 1898년 3월 23일 논산군 채운면 삼암리(가지골)에서 태어나셨고 1975년 07월 3일 타계하였다. 어려서부터 선친께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 한 몸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하며 훌륭한 인격자로 후세 교육에 힘써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한다. 


일제 강점기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 논산지방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 독립운동을 갈망하던 선생의 가슴 속에 독립의 혈기가 치솟았다. 선생은 동지들을 규합하고 강경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이끌었다. 채운면 삼암리 자택에서 태극기 5백장을 만들었다. 


 3월 20일 10시경 가마니 속에 넣고 자신이 직접 지게에 지고 강경 장터에 가서 3차례 걸쳐 만세 시위 주동 역할을 하다가 일경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그 많은 태극기를 본인이 다 만들었다면서 동지의 이름을 불지 않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공주 감옥에 이감되어 옥고를 치루는 동안 두 가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기독교로 무장하고 교육의 힘으로 독립을 이루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근석 선생(앞줄 좌에서 2번째)


뒷줄 우측 1번= 이근석님 / 3번째= 독립운동 함께한 ‘한내과’ 외조부 남도학(남기언)님/ 앞줄 가장 우측= 이희로교장)


출감 후, 1923년 3월 “채운학원(彩雲學院)”을 창설하여 2세 교육에 헌신하셨다. 나라 없는 설음을 되새기면서 “나라의 부강만이 독립의 길이요, 이 길을 따르려면 국민 각자의 실력 배양의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설립한 것이다. 주민들의 문맹퇴치와 청소년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으나 1925년 2월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고 만다. 


왜경의 눈엣가시가 되어 감시가 심해지자 논산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어 서울로 올라가 독립투쟁에 가담하였다. 1932년 왜경의 감시가 뜸해지자 다시 논산으로 내려와 부적면에 “신풍학원”을 창설하여 청소년들의 항일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민족의 염원인 독립 투쟁과 국민 계몽에 앞장섰다. 


1936년에는 논산에 교회를 창립하여 민족 계몽과 함께 기독교 복음전파에도 노력하였다. 가야곡 삼전리와 화산에도 살았으며, 시내에 들어와서는 새샘교회(기독교장로회)를 세웠다. 



민족의 얼독립운동의 기상이 깃든 기민중학교


1945년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아 10월 1일 논산읍 대교리에 논산공민중학교(公民中學校)를 세웠다. 1949년 논산고등공민학교로 개칭 운영하였고, 1955년 재단법인 기민학원으로 인가받아 봄부터 6학급의 기민중학교를 설립하였다. 


처음 설립된 기민중학교는 논산 대교시장 맞은편에 위치하였으며 1962년 12월 31일 15학급으로 변경 인가되었다. 믿음・소망・사랑을 교훈으로 1955년부터 1962년까지 초대 학교장을 맡아 백성의 기본이 되는 기초 교육을 이끌었다. 독립지사 이근석 선생의 학교에 대한 애정은 교가 작사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정기 받은 계룡산 우리의 기상 깊고 맑은 금강물 우리의 역사 

믿음 소망 사랑으로 세워진 전당 무궁화 가지마다 꽃을 피우자.

숭고한 혼을 받은 단군의 자손 온 누리에 빛 내리 기민중학교

하나님이 정해주신 이 터전 위에 진리의 높은 탑 이루어가며

정의의 익은 열매 알알이 맺고 역사를 이어나갈 아들이 되자.

명랑하게 솟아오른 아침 해처럼 온 누리에 빛 내리 기민중학교


이근석 선생 뒤를 이어 기민중학교 교장으로 봉직했던 이희로(3남) 장로님과 황경학 사모님


그 후 기민중학교는 이근석 선생의 후손 이재로(6촌), 이희로(3남) 교장에 의해 이어져 내려왔다. 1980년 9월 17일 대교리(현 대교동)에 있던 기민중학교가 지산리(현 관촉로) 현 위치로 이전 계획이 승인되었고, 1982년 9월 11일 신축교사 준공식을 가졌다. 새로운 터전에서 1985년 11월 1일 임헌하 이사장에 의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학생중심의 교육


새 장을 열게 된 기민중학교는 독립지사 이근석 선생의 독립정신과 믿음・소망・사랑의 건학 이념을 이어받은 선생님들이 교육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헌신한 결과 2019년 지금까지 제71회 12,97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교육을 통해 민족 계몽과 나라를 부강시키고자 했던 독립지사 이근석 선생과, 교육에 열정과 희망을 가졌던 임헌하 선생의 노력에 힘입어 이제는 명실상부 논산의 명문 사립중학교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현재 기민중학교(임재수이사장, 김용권교장)는 지산동에 위치하여 교통이 다소 불편했는데, 지금 상황은 상당히 좋은 교육환경으로 바뀌었다. 논산 공설운동장 및 청소년수련원과 건강관리센터가 있고, 논산 시민공원이 만들어지고 논산문화원이 이전하였으며, 논산시립도서관이 준공을 앞두고 있다. 


요즘 학교는 지역사회와 함께 발전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기민중학교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학생중심의 행복한 교육에 가장 적합한 교육환경을 갖추고 4차 혁명의 시대에 기초 교육의 전당이 되기 위해 재도약의 기지개를 펴고 있다.

학교내에 있는 이근석선생 기념비(좌)와 2019 기민중학교 정문(우)


독립지사 이근석 선생의 한 사람의 독립 의지와 희망이 기민중학교를 통해 펼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라 잃은 설움을 교육을 통해 깨우치고, 나라를 되찾고 부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의 결실이 이 학교를 통해 훌륭하고 멋진 학생들을 배출했으며 중학교 기초 교육의 밑거름이 되었다.


- 원만희, 이재호 공동집필(가필 이진영)



[글] 이지녕(놀뫼신문사 기자) 
[사진] 한성필(한내과 원장, 이희로 교장의 사위)


이 글은 『놀뫼신문』 2019-02-20일자에 실린 기사입니다. 

https://nmn.ff.or.kr/17/?idx=1617505&bmode=view


지금까지 나간 기획의 3번째입니다. 

[3·1운동100주년기념 기획시리즈(1)] 
 강경에서 번져나간 론산 기미년3·1운동 불꽃 좇아 

https://nmn.ff.or.kr/17/?idx=1551792&bmode=view

[3·1운동100주년기념 기획시리즈(2)] 

강경3·1운동 효시 엄창섭 열사의 고향 상제마을과 제석교회

https://nmn.ff.or.kr/17/?idx=1603038&bmod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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