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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녕 쌩글삶글 Apr 11. 2019

한훈(韓焄) 그 이름과 행적에 걸맞는 기념관을 주초하며

- “한훈기념관” 추진계획과 뒷이야기들

지난 4월 1일, 계룡시는 국회의원과 도의원을 초치하여 정책협의회를 가졌다. 이때 나온 계룡시 주요 현안사업 중 하나가 계룡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한훈기념관’ 건립이었다.  ‘한훈기념관’은 국방군사도시 계룡의 한복판인 신도안면 정장리 한훈 선생이 생활하던 집터에 건립 예정이다. 계룡시의 항일독립운동 관련 사업 초석이 될 이 사업은, 현재 계획대로라면 올 10월쯤 첫 삽을 뜨게 될 전망이다. 


독립운동가 한훈 선생의 장손자인 한상회 씨가 조부의 집 터를 둘러보고 있다.(사진제공 국방일보)

제일 큰 문제는 예산이다. 총사업비는 15억 4600만원이다. 국비 1억, 도비 3억에다가 시비 11억 4600만원으로 추진중인데, 국비 1억원을 최근 추가 확보하였다. ‘한훈기념관’ 건립사업이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기념 공모사업’에 선정된 것이다. 


행정안전부와 대통령직속기관인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공동 주관한 이번 공모사업에 계룡시가 선정된 데는 이유가 있다.  지난 2013년 8월부터 계룡지역 항일독립운동 재조명 학술대회를 시작하는 등 지역 독립운동가 발굴 노력을 지속해 온 성과물이 원인(遠因)이다. 근인(近因) 중 하나는 담당공무원의 집념이다. 


한훈기념관’ 3·1운동 100주년기념 공모사업 선정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는 10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일종의 경쟁을 유도하였다. 고장의 독립운동가 발굴 등으로 3·1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좀더 확산시키고자 시군별 발표를 하게 한 것이다. 발표에 이은 심사를 거쳐 최대 1억원, 최저 2천만원을 선별 지급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제2차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공모 발표 및 심사는 지난 3월 19일 정부서울청사 3층 위원회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1차에서 선정된 여수시청 등 14개 자치단체 공무원들이 지자체를 대표하여서 추진계획을 발표하였다. 계룡시에서는 한관성 복지정책팀장이 단독 상경하여서 독립운동가 ‘한훈’기념관 건립사업에 대하여 그 타당성과 추진계획을 설명하였다. 심사 결과 최고액인 1억원의 국비(특별교부세)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이번 공모발표에는 뒷 얘기가 좀 있다. 국과장보다는 업무를 실제로 추진하는 주무자가 나가는 게 좋다고 판단하여서 복지정책팀장이 홀로 참석하였다. 1억이라는 최고점을 다 받기 위하여 복장부터 차별화하였다. “같은 발표자들은 물론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끌고, 우리 지역의 독립운동사업을 확실하게 홍보해보고자 여러 고민을 했습니다.” 첫번째 떠오른 생각이 100년 전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다한 독립투사의 복장으로 발표대에 오르는 것이었다. 



한관성 계룡시 복지정책팀장(우)와 광복단 결사대 기념탑 앞에서  항일독립정신을 기리며 경례하는 육·해·공군·해병대 의장대(사진제공 국방일보)


공무원들끼리 겨루는 이 자리에는 대개 3인 정도 참석하였으며, 7인이 참석한 지자체도 있었다. 이에 비하여 독립군 복장을 챙겨 입은 한팀장은 단기필마로 나아갔다. “국내항일무장투쟁의 최고봉인 한훈 애국지사의 독립정신 일만분의일이라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일개 작은 지방공무원이지만, 우리 지역 주민과 학생들이 독립유공자의 업적을 알고 느끼며 계승 발전시키는 자리라 생각하니 비장해지더군요.”

원고를 통째로 왼 다음 관중과 참석위원들 눈을 보면서 한훈 선생의 공훈을 비롯, 간략하나마 계룡시 독립항쟁사를 설명해나갔다. 한훈기념관 추진사업이 3·1독립운동으로서만 아니라 국가보훈처에서 추진중인 현충사업의 일환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현재 계룡시에서 추진중인 독립운동기념사업 장단기 발전계획까지 설명을 마쳤다.  


그 결과 추가 국비는 1억원으로 낙착되었다. 도비 3억원은 지난 2월 15일 확보 완료하였다. 총 사업비 1,546백만원 중 비중이 가장 큰 나머지 1,146백만원은 3월 29일 시비 추경예산으로 확보가 되었다. 작년 11~12월 충남대학교의 ‘광복단결사대 한훈 기념관 건립 용역’ 결과 애초 예산 6억 4천을 15억 4600만원으로 변경하게 되었다. 그 변경 예산에 다시 1억을 더하여 총예산 16억 4,600만으로 진행이 가능해졌는데, 최근 추가로 확보한 국비는 기념관 주변의 부지정리 등으로 쓰일 예정이다. 


한훈국내무장투쟁의 선봉장


계룡시에서 기념관까지 지으려고 추진중인 한훈은 누구인가? 계룡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 한훈 선생은 국내항일무장투쟁의 1인자이다. 해외에서 투쟁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총검이 시퍼런 조선 본토에서 암약한 결사대장이다. 1920년 광복단결사대를 조직해 일본총독을 처단하고자 계획하였으나 체포되어 19년의 옥고를 치룬 독립운동의 거장이다. 밖으로는 김좌진 장군에게 군자금 지원 등 해외투쟁도 지휘했던 인물로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서훈됐다. 2002년에는 국가보훈처에서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한훈 선생은 국내에서 가장 치열하게 항일무장투쟁을 하였던 1인자이다. 의병, 을사오적척결결사대, 광복단, 광복회조선독립군사령부, 광복단결사대에서의 무장투쟁 등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한훈(韓焄; 1889-03-27 ~ 1950-09-10)

 - 1906년 : 홍주의병 소모장으로 궐기

 - 1907년 : 신도안에서 나철, 오기호, 이상학 의사들과 을사오적척결결사대를 조직하여 거사 준비

 - 1909년 : 친일관리 직산군수를 주살(誅殺)하고 만주로 망명

 - 1912년 : 은밀히 귀국 후 광복단을 조직하여 만주지역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금

 - 1913년 : 풍기에서 대한광복단 조직

 - 1915년 : 광복회를 박상진과 조직하여 독립운동군자금 모금 활동 전개. 친일파 처단에 전력.

 - 1918년 : 광복회 참모장으로 김좌진 장군을 만주 북로군정서로 파견한 후 군자금 지원

 - 1919년 : 기미독립만세운동 직후에 만주로 망명한 후 상해임시 정부의 이시영, 안창호, 이동녕 등 수뇌부를 만남. 조선독립군정서 가입 

 - 1920년 : 조선독립군사령부와 광복단결사대를 조직하여 사이토 조선총독과 정무총감을 제거하기 위해 차량 3대에 폭탄 40관, 권총 30정, 실탄 3000발을 분승하여 시가전을 준비하던 중 하루 전에 현장에서 체포됨. 8년형 선고, 의병활동 발각 23년형 선고 

 - 1939년 : 19년 6개월 복역후 형집행정지처분으로 출옥. 신도안 정장리로 들어와 은거. 석련 서석준 선생과 함께 애국후학 양성에 힘씀.

 - 1945년 : 서울 견지동에서 광복단 재건(단장 : 한훈). 광복단 신익희, 조소앙 선생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

 - 1950년 : 6·25동란 중 북한군에게 납치되어 원정역 부근에서 총살

 ※ 1968년 : 건국훈장 독립장 서훈 

 ※ 2002년 : 2월의 독립운동가 선정


계룡시 한훈기념관 추진일지


이상의 활약상에서 보다시피 한훈 선생은 3군본부가 주둔한 계룡시와 대한민국 국군의 정통성을 대변할 현역 투사이다. 대한민국 국방수도이자 호국문화도시인 계룡시는 일제강점기때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기념관 추진의 주역이기도 한 김철규 계룡지역향토사연구회장은 이색 통계를 내놓는다. “계룡시는 전국에서 가장 작은 시이지만, 일개 면단위에서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입니다. 건국훈장서훈 독립운동가 17명, 미포상애국지사 32명, 독립비밀결사활동가 11명 등 60여명에 달하니까요. 분야별로도 순절, 의병, 국내항일무장투쟁(한훈, 이을규 등), 해외항일무장투쟁(양기하장군, 김병희 등), 3·1운동(배영직, 이순화 등), 교육계몽 등 다방면입니다.”


독립운동가 한훈 선생의 장손자인 한상회 씨가 조부의 집 터에 남아있는 돌담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다.(사진제공 국방일보)


그 동안 계룡시가 추진해온 독립운동 관련 사업은 광복단결사대기념탑, 삼신당, 두계장터 ․ 십이일민회 석벽 등이다. 한훈 선생 주거지는 신도안면 정장리 273-2번지 일원으로 현재 주초석 및 담벽 일부만 잔존하고 있다. 기념관은 부지 1180㎡ 위에 지상2층(건축면적 451㎡) 예정으로 추진중이다. 내부는 박물관 수준의 수장고, 체험실, 추모실, 기념실로 구성된다. 이 사업의 전담은 사회복지과 복지정책팀장 등 2명이다. 협조부서는 계룡시 보훈단체협의회, 대전충남광복회이다. 지금까지 추진상황과 향후 계획을  살펴본다. 

 -2013. 8월 : 계룡지역 항일독립운동 재조명 학술대회

 -2015. 12월 : 독립운동기념사업 기본계획 수립 용역 완료

 -2016. 3월 :「한훈」기념관 건립사업 추진을 위한 공동협력추진단 구성(시 ․ 광복회 ․ 보훈단체) 

 -2016. 9월 : 한훈 기념관 건립 기본계획 마련(방침결정)

 -2016. 12월 : 국방부소유 부지 매각승인 요청(계근단)

 -2017. 1~5월 : 공유재산관리계획 (→ 의회승인) 및 부지매입비 예산편성(추경) 

 -2018. 1~8월 : 국방부 소유부지 매입요청(→ 국방부 매각승인) 및 부지매입 완료

 -2018. 9~12월 : 광복단결사대 한훈 기념관 건립 용역 (충남대학교) 

(학술용역 결과 6억 4천의 계획을 15억 4600만원으로 변경)

 -2019. 2~8월 : 기본 및 실시설계 용역, 건축허가 신청, 공사입찰 품의

 -2019. 11월 : 기념관 건립공사 착공

 -2020. 6월 : 기념관 준공 및 기념행사 준비


한훈 대장의 후손들 이야기


현재 계룡대 2정문 진입로 ‘무궁화동산’에는 ‘광복단결사대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기념탑의 기단 폭과 탑신의 높이는 1907㎝다. 한훈 선생이 계룡 신도안(新都內)에서 을사오적 처단을 위해 비밀결사를 조직한 1907년을 기리기 위한 상징적인 장치다. 기념탑의 불꽃과 날개가 어우러진 모습이 ‘광복단 결사대’의 위용을 웅장하게 보여준다.


한훈기념관 계룡시 건립에 대하여 소극적인 의견도 있다. 광복단기념공원은 경상북도 영주 풍기읍에 이미 있다. 한훈 선생 고향은 계룡이 아니라 거주지였으며, 총독을 살해했다든지 하는 전과(戰果)가 혁혁하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을 이유로 든다. 


그러나 한훈 한 사람으로 인하여 신도안은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식민속국 한복판에서 암약하는 그를 체포하고자 혈안이 된 왜경들이 괴롭힐 첫 대상은 신도안에 거주하는 그의 가족들이었다. 한훈의 첫번째 부인은 출산 상태에서 일본경찰에게 연금되고, 먹을 것도 주지 않아 모자가 굶어죽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이번 두계장터 4.1만세운동때 선친을 대신하여 큰 절을 받은 한훈 선생의 손자 한상빈 신도안향우회장 입에서 밑도 끝도 없이 흘러나온다. 유응두! 85세로 작고한 이 여인은 광복단결사대 한훈 대장의 두 번째 부인이자 한상빈 씨의 친할머니다. 오직 농사만 짓던 이 여인은 철부지 손자가 투정을 부리면 모시 적삼을 끌어내렸단다. “상빈아, 네 할아버지 찾아내라고 할미 어깨뼈도 망가뜨린 게 무서운 일본놈들이다. 독립운동 얘기 함부로 꺼냈다가 너도 이렇게 모진 꼴 당할 수 있으니 입 꼭 다물고 살어!”


한훈 대장은 두 남매를 두었다. 딸은 1923년 독립운동가들의 무덤인 종로경찰서를 폭파하고 수백명의 일경과 교전 중 순국한 김상옥 의사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들인 한세택 씨는 머리는 비상하였지만 현실은 그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분을 못 이길 때는 한훈 선친이 숨겨두었던 육혈포를 꺼내서 탕탕 쏘곤 했단다. 6·25사변전 강경에서 사업을 하던 그는, 부친인 한훈 대장이 북송 도중 사망하게 되자 신도안 안터골로 들어와 어머니를 모시면서 살기도 했다. 


그의 부인은 상회, 상빈 두 형제만 남겨두었다. 신도안에서 부모를 모시던 첫째손자 한상회 씨는 대전으로 나가 무인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며 상당한 입지를 구축하였다. 둘째 손자 한상빈 씨가 현재 사는 곳은 논산 광석이다. 계룡시가 조성되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6·20사업이 비밀리 시작되었고, 신도안 주민도 대규모 이주를 해야 했다. 당시 동네 이장이던 한상빈씨는 찾아나선 곳이 광석(廣石) 평야였다. 거기서 거둔 쌀은 지금도 계룡시 보훈가족과 고향인 신도안면에 나누어진다. 


올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의 해이다. 내년 6월은 한훈기념관 준공식, 9월은 계룡세계군문화엑스포이다. 이러한 즈음, 이웃을 생각하고 나라를 위하는 길이 진정 어디에 있는지 찾아본다. 혈혈단신으로 종횡무진하던 선구자에게 물어본다, 암중모색하여 찾아낸 그 길을......


[글·사진] 이지녕

위 사진 중 일부는, 한상빈&김철규 님, 계룡시청, 국방일보 등에서 제공하였습니다. 

이 글은 『놀뫼신문』 2019-04-10일자 8면에 실린 기사입니다.

https://nmn.ff.or.kr/20/?idx=1770792&bmod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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