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베 Jun 28. 2018

자베로드-평양냉면

지극히 개인적인 평양냉면 기록

4년 전이었다. 분명 달랐다. 평소에 모르던 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육향이 뭔지 그날 깨달았다. 얇디얇은 메밀면이 입술을 간질였다. 면을 다 먹고 나서 남은 국물까지 모두 들이켰다. 바닥에 고춧가루 몇 톨만이 남았다. 필동면옥에서 평양냉면 맛 각성이 왔다. 그 전까진 촌스럽지 않아 보이려 맛을 아는 척했다. 상대가 맛있다고 하면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맛있네요'란 짧은 대답과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보냈다. 이 날에야 그 맛이 무언지 알았다.


집에 가는 내내 냉면 맛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음날도 물론이었다. 눈을 뜨면 냉면 생각이 났고 눈을 감아도 냉면 생각이 났다. 냉면 마니아를 자처하던 친구에게 연락했다. 궁금하다. 알려달라. 도대체 평양냉면 때문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다. 친구는 혀를 찼다.


"내가 그렇게 맛있다고 난리 부릴 땐 꿈쩍도 않더니."
"아, 모르겠고. 진짜 미치겠어. 냉면 생각만 나. 맨날 필동면옥을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해야 해? 지금도 먹고 싶어 미치겠어. 뭐 이래 이거."


친구는 크게 한 번 웃고 난 후 의정부가 어쩌고, 장충동이 어쩌고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되짚어보니 을밀대, 우래옥, 평래옥 등등 꽤 여러 곳을 이미 가봤다. 고개를 끄덕이며 맛있는 척만 했던...


시간과 상황이 허락하면 냉면집 곳곳을 찾아갔다. 새로운 곳은 물론 가본 곳도 다시 들렀다. 집집마다 맛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슴슴한, 밍밍한 맛이 아니었다. 전체적 맛의 스펙트럼이 좁을 뿐 깊고 깊었다. 어떤 고기를 어떤 방식으로 삶아내느냐에 따라 육향이 다르게 표현되었다. 감칠맛의 정체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메밀향은... 여전히 모르겠다. 메밀 함량에 따라 면 스타일이 달라지는 건 명확하게 알겠지만 메밀향이 직접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이 부분은 전문가도 의견이 갈린다. 나는 메밀향은 느껴지지 않는다 쪽.


일주일에 3일 이상 평양냉면을 먹었다. 점심, 저녁을 연속으로 먹는 날도 허다했다. 미팅 나가는 길에 일부러 들렀고 주말이면 부모님을 모시고 갔다. 평일 저녁에도 혼자 냉면집을 찾아 소주를 반주 삼아 냉면 한 그릇과 제육이나 수육 반 사이즈를 먹었다. 행복했다. 혼자도, 둘이도, 여럿이도, 친구와도, 연인과도, 가족과도 평양냉면을 먹었다. 일종의 오르가즘에 가까운 기분에 사로잡혀 반년을 둥둥 떠다녔다. 다른 음식은 관심도 가지 않았다.


6개월이 지나고 평양냉면 사랑이 약간은 시들해졌다. 냉면을 등졌다는 말은 아니다. 여전히 한 달에 서너 번은 평양냉면을 먹는다. 정신을 차리고 휘몰아치던 감정을 추슬렀다. 강렬한 연애를 마친 기분이었다. 분명 그 감정은 사랑이었다. 그 과정은 연애였다. 연애의 흔적을 정리한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평양냉면에 대한 기록이다. 동의는 구하지 않겠다. 강요도 하지 않겠다.



자베로드-평양냉면

평냉마니아들의 정설(?)+개인적 의견을 곁들인 분류 및 평가

(직접 가본 곳 위주. 이미 당신이 알고 있는 내용 다수 포함)

*멋대로 올드스쿨, 뉴스쿨, 지역 강자, 신흥 강자, 뉴 스타일로 분류.


올드스쿨

(얇은 면발, 정통성 있거나 계보 계승)


의정부 계열

평양면옥

의정부 계열 원조집. 얇은 면발과 맑고 육향 진한 국물. 본점인데 오히려 컨디션 많이 탐. 방문 때마다 맛 차이가 큼. 여름 성수기 식사시간 대기 필수.


평양면옥 스타필드하남점

의정부 평양면옥 직영점. 오픈 당시 퀄리티 저하 우려해 의정부 본점 문을 한 동안 닫고 준비한 것으로 유명. 대형몰에서 맛보기 힘든 제대로 된 냉면.


필동면옥

평양냉면 각성 오게 한 곳. 여전히 개인적 1위. 의정부 계열 중 가장 정리된 맛. 고춧가루를 과하게 뿌려주는 경향이 있음. 식사시간 기준 줄 서야 함.


을지면옥

필동면옥보다 본점에 가까운 맛. 방문 연령대가 높아 노인들 사이에서 먹는 분위기가 색다름. 식사시간 기준 줄 서야 함.


본가 평양면옥

의정부 계열 막내 집. 다른 곳들에 비해 육향이 훨씬 진한 편.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 고려한 듯. 식사 시간 거의 만석이나 웨이팅 없는 편.


장충동 계열

평양면옥(장충동 본점)

장충동 계열 본점. 크게 튀지 않는 밸런스가 장충동 계열의 특징. 방문 때마다 맛 편차 크지 않음.


평양면옥(논현동)

장충동 본점 제대로 계승. 본점과 거의 비슷한 맛. 성수기 웨이팅 살짝 있음.


평양면옥(분당)

본점보다 정돈된 맛. 식사시간 거의 만석이나 웨이팅 없음.


오리지널 서울 스타일

우래옥

거창하게 오리지널 서울 스타일이라고 칭해봄. 올드스쿨 중 가장 독창적인 스타일. '평양냉면'이란 이름을 처음 쓴 집으로 추정. 서울 사람들이 서울에서 먹는 평양식 냉면에 대한 해석을 내놓은 집. 원형에 가까운 서울식 불고기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오고 있기도 함. 언제 가더라도 웨이팅 필수. 실내에서 앉아서 편하게 기다릴 수 있음.


뉴스쿨

(굵은 면발, 아주 진한 육향)


정인면옥

굵은 면발, 육수에 동치미를 전혀 쓰지 않은 스타일인 2000년대 뉴스쿨 평양냉면 선두주자. 올드스쿨보다 훨씬 진한 육향이 인상적. 얼마 전부터 웨이팅 필수. 웨이팅 없던 시절에 많이 다니길 잘 한 듯.


정인면옥(광명)

정인면옥은 원래 광명에서 시작. 유명세 탄 후 여의도로 이전하며 광명 업장을 상호 그대로 매각. 궁금해서 가봤는데 딱히 평가할 수 없는 수준... 별로 인상적이지 않은 맛으로 명맥만 유지하다 최근 절치부심. '광면 정인면옥이 달라졌다'란 소문이 돌기 시작. 조만간 방문 예정.


능라도

정인면옥과 전혀 관련 없는 업장이지만 거의 동시대에 거의 비슷한 냉면 스타일을 선보이며 뉴스쿨 평양냉면 이끌고 있음. 굵은 면발, 진한 육향, 맑은 국물 삼박자 훌륭. 고명으로 올라가는 고기 퀄리티가 전국 냉면집 통틀어 최상. 컨디션을 타는 편인데 컨디션 최상인 날은 천상의 맛, 별로인 날은 내가 이러려고 먼 길 달려왔나 싶은 맛. 업장이 넓어서 웨이팅 거의 없음.


능라도 강남점

판교 본점에 전혀 뒤지지 않는 맛. 서울 살면 굳이 판교점 찾아가지 않아도 됨.


봉피양 방이점

몇 년 전 우래옥 김태원 주방장을 영입하며 새롭게 떠오른 곳. 우래옥에서 우래옥 레시피로만 몇십 년 동안 냉면 만들던 분을 '마음대로 만들어보세요'란 말로 설득해 영입 성공. 돼지고기, 소고기, 닭고기를 모두 사용하며 김태원표 평양냉면 만들어 . 많은 이들이 새롭다거나 진보라고 표현하는데 신기하게도 나에겐 2~30년 전 어린 시절 먹어본 평양냉면 맛과 비슷함. 이것이야말로 진짜 개인적 기억. 웨이팅 너무 길어 굳이 안 감. 봉피양은 벽제갈비에서 운영하는 고깃집+냉면집인데 방이점 말고는 그냥 그저 그런 냉면 맛. 나쁘지도 아주 좋지도 않은 딱 그 수준.


지역 강자

(지역을 대표할만한 곳, 업장별 고유 스타일 뚜렷)


을밀대

다른 지점은 별로라고 하도 악명이 높아서 본점만 여러 번 방문. 각성 오기 전 일산점 방문했는데 맛도 기억 안남. 평양냉면이라는 분류보다 그냥 '을밀대'란 장르의 냉면. 어디에도 없는 맛. 그만큼 호불호 갈림. 개인적으로는 굳이 오래 줄 서서 먹고 싶을 정도는 아님. 항상 오래 줄 서야 해서 매번 포기.


서북면옥

다소 투박하지만 훌륭한 수준. 이 지역에 유일무이 평양냉면집이라 인기가 높음.


부원면옥

유명새가 무색할 정도로 실망스러운 맛. 물엿으로 추정되는 단맛이 왜 냉면에서 나야하는지 전혀 모르겠음. 다른 곳에 비해 싼 게 가장 큰 장점인데 그냥 비싼 돈 주고 제대로 된 냉면 먹는 게 나음.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최악의 냉면집.


남포면옥

명성에 비해 맛이 엄청나지 않음. 부원면옥 정도는 아니지만 물엿으로 추정되는 단맛이 전체 밸런스를 무너뜨림. 단맛 추가는 동치미를 사용한다고 알려진 곳들이 동치미 퀄리티 유지가 힘들어 선택한 고육지책이 아닐까 싶은데. 아직도, 왜, 냉면에서, 단맛이 나야하는지 전혀 모르겠음. 동치미는 그 어떤 전문가도 1년 내내 일정한 맛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 냉면집들이 고기 육수로만 승부를 보는 추세.


유진식당

싼 가격만큼의 딱 그 맛. 다시 가고 싶을 정도는 아니지만 냉면이 메인이라고 보기 힘듦. 다른 안주와 소주 마시기는 정말 좋음. 웨이팅 필수.


평래옥

동치미 쓰는 남포면옥, 부원면옥과 같은 계열로 분류 가능함. 셋 중엔 가장 훌륭. 물+다시다+식초+설탕 조합만으로도 만들어낼 수 있는 가짜 냉면(일명 고깃집 냉면)이 이런 맛을 흉내내고 싶었구나 확실히 깨달을 수 있음. 살짝 시큼, 살짝 달큼한 와중에 육향이 느껴짐. 굳이 평양냉면 마니아가 아니어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정도. 내 취향이라는 말은 아님. 초계탕, 닭무침도 별미.


평양냉면

구로구 유일무이 평양냉면집. 오류동까지 찾아가서 먹어볼 정도는 아니지만 근처라면 매일 가도 무리 없을 정도로 훌륭한 수준.


강서면옥 압구정점

전혀 인상적이지 않아 본점이 궁금하지도 않음. 강남 쪽에 괜찮은 냉면집 많아져서 굳이 갈 필요 없을 듯.


대동관

양천구에 부모님과 같이 살던 시절 자주 가던 곳. 제대로 된 냉면 맛볼 수 있는 양천구에서 가장 가까운 집. 굳이 찾아갈 정도 수준은 아님. 일산 본점도 유명.


동무밥상

평양 옥류관 출신 탈북자 사장님이 운영하는 곳으로 유명. 평냉마니아들은 오히려 의아해하는 맛이라는데 안 가봐서 아직 확인 못함. 황교익 칼럼니스트 말로는 "어쩌면 이게 진짜 평양에서 수십 년 동안 변형되어 온 진짜 평양냉면 맛일지도 모른다"는데... 웨이팅 두려워서 방문 차일피일 미루는 중. 그게 몇 년이 지나버림.

드디어 방문. 방문 후 코멘트 덧붙이자면.. 굳이 찾아갈 필요까지는 없을 듯. 음.. 그냥 그런 수준..  


신흥 강자

(오픈한 지 1~2년, 노포 못지않은 맛과 분위기)


진미평양냉면

주방장이 의정부 계열과 장충동 계열 냉면집에서 모두 일해본 것으로 유명. 두 특징을 모두 담았다는데 개인적으로는 장충동 계열에 가까운 맛. 웨이팅 있으나 손님 특정 수 이상 불어나면 바로 앞 별관으로 안내. 같은 주방에서 음식만 날라줌.


피양옥

신흥 강자 중 으뜸. 어디서 이렇게 잘 하는 데가 갑자기 튀어나왔나 싶음. 냉면 밸런스 좋고 나머지 메뉴들도 훌륭. 무엇보다 장점은 소주, 맥주 획일화가 아니라 다양한 주류 구비한 점. 조금은 고급진 술과 함께 음식 즐길 수 있음.


뉴 스타일

(오픈한 지 1~2년, 신흥 강자까진 아니지만 방문해볼 만함, 개성 넘치는 도전)


련남면옥

조개 육수로 간 하는 게 특징. 음.. 이런 맛도 가능하구나 싶은 독특한 냉면. 충분히 방문해볼 만함.


고메구락부

꿩 육수가 특징. 냉면집이라기보단 그냥 신기한 메뉴 파는 젊은 느낌 식당에 가까움. 한 번 정도 가볼만함.


광화문국밥

박찬일 셰프가 해석한 평양냉면은 이런 것. '고급스럽고 정갈하고 깔끔한 음식'이 바로 냉면이라고 설명해주는 것 같은 느낌. 원래는 돼지국밥집인데 냉면도 수준급.


의외

(수준급 고깃집 냉면)


서경도락

논현본점만 방문해봄. '고깃집 냉면 수준이 이 정도야' 싶은 고퀄 냉면. 24시간 영업이라 술 마시다 생각나면 달려감. 왜 밤에 하는 평냉집은 없는 겁니까...


배꼽집

배꼽집이란 상호처럼 요상한 냉면을 맛볼 수 있음. 평양냉면 범주에 굳이 포함할 수 있을지 애매한 경계. 고기 외에 채소를 많이 사용한 듯한 육수 맛. 맑은데 매운맛도 올라옴. 충분히 도전해볼 만한 재밌는 맛. 논현점과 상암점 맛 차이 있음. 개인적으로는 논현점 승.




맛집 정보가 더 궁금하시다면 100 플레이스 매거진을 구독해주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2016년 미식 트렌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