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이, 나이가 들수록 더 또렷하게 다가온다. 어릴 적 내 눈에 비친 세상의 첫 번째 어른은 부모였다. 말투, 표정, 분노하는 방식, 침묵하는 태도까지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의식적으로 배우지 않았는데도, 어느새 나는 그 잔상들을 닮아가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굽실거리던 모습. 부당한 상황에서도 항의하지 못한 채 쩔쩔매던 어깨.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사소한 일에도 버럭 화를 내던 장면. 그 대비가 어린 마음에 강하게 박혀 있었다. 힘 있는 사람 앞에서는 작아지고, 만만한 사람 앞에서는 커지는 태도. 그 기억이 지금의 나를 빚어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강약약강’의 방식으로 살았다. 약한 사람에게는 괜히 센 척을 했고,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쉽게 짜증을 냈다. 친하다는 이유로 함부로 굴었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걸 알면서도, 몸에 밴 반응은 생각보다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그때 실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뀔 수는 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방향을 틀 수는 있다. 나는 그 변화의 출발점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믿는다. 스스로를 채우지 못한 채 억눌린 분노로 버티던 마음이, 조금씩 다른 온도로 데워지기 시작했다. 인정받지 못해 쌓였던 서운함, 표현하지 못해 굳어버린 억울함이 서서히 풀렸다.
우리 집에는 유독 분노가 많았다. 할아버지는 화병으로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말로 다 하지 못한 응어리가 몸을 망가뜨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래서 나는 한때 ‘우리는 원래 이런 집안인가 보다’라고 체념했다. 대대로 내려오는 기질처럼 여겼다.
하지만 요즘 돌아보면, 그 분노의 밀도가 예전과는 다르다.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전히 화가 나고, 욱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도 있다. 다만 그것이 나를 삼켜버리지는 않는다. 폭발 대신 멈춤을 선택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누그러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이 변화가 내 의지의 결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스스로를 합리화하거나, 감정을 억지로 눌러 만든 평온이 아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분명히 마음 깊은 곳이 다른 무언가로 채워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부른다.
결국 사람은 보고 자란 대로 흘러가기도 하지만,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분노가 대물림되는 자리에서, 사랑이 대물림될 가능성을 본다. 그리고 그 가능성 위에, 오늘의 나를 조심스럽게 올려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