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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Dec 09. 2020

‘도둑나이’와 강골바람

어느 현재주의자의 ‘길을 찾는 여행’ (36회)

“‘도둑나이’란 외려 시간을 도둑질당한 것인지 모른다”


  가령 12월쯤 태어나서 해가 바뀌어 한 살을 더 먹으면 그걸 두고 ‘도둑나이’라고 한단다. 꼭 도둑질에 비유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 살 같은 두 살이자 평생을 두고 11개월 먼저 태어난 사람과 동갑으로 살게 된다. 12월에 출고된 승용차라면 중고차로 팔 때 불리한 조건이 될 수도 있다지만, 인간계에서는 꼭 불리할 것도 없으니 그런 호(號)가 붙었는지 모른다.     


  어린 자신을 두고 날마다 할머니는 ‘도둑나이 먹은 놈’이라 불렀었다며 괜히 잘못한 것도 없이 욕 듣는 기분이 들어 좋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또 어릴 때 잠깐 멋모르고 지날 때야 그렇다 하더라도 세월이 지나 어른이 되면 네댓 살 정도는 친구로 지내는 일도 흔하니 별 실익도 없는 도둑질이라며 웃었다. 그러나 ‘도둑나이’의 도둑질이란, 나이를 훔친 게 아니라 외려 시간을 도둑질 당해 원치 않게 한 살을 억지로 더 먹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이 탄생은 자신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는 자연법칙에 부합하는 해석일 터다.



  점심을 함께 먹으며 그런 얘기를 나눌 때 창밖 주천강 물살은 햇빛을 받아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여전한 황갈색 풍경 속에서도 어딘가 새 움의 푸른 향기가 나는 듯했다. “버들강아지가 조금 피었다가 꽃샘추위에 쏙 들어갔는데 이젠 다시 나와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그러자 다른 이는, 이곳은 강줄기를 따라 형성된 ‘버덩 지형’이라 유난히 바람이 세차고 매섭다며 이를 ‘강골바람’이라 부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4월에도 눈이 자주 온다고.     


  그러한 오후는 동반자들과 함께 맑고 따뜻한 기운이 넘쳤다. 실제로 낮 최고기온은 13도였다. 내리 이틀을 꼼짝도 않고 작업에만 매달린 터라 의무감으로라도 주변 산책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날도 쾌청하니 기분도 상쾌했다. 그렇게 강림으로 가는 ‘산소길’ 푹신한 비포장 양탄자로 나섰다. 여기서 ‘산소’는 묘가 아니라 숨 쉴 때 들이마시는 그 산소(酸素)임은 따로 밝힐 필요가 없지만.



  예버덩에서 강림은 걸어서 왕복 7km에 가깝다. 그러니 거기밖에 없는 편의점엘랑 가서 막걸리라도 한 병쯤 사와야지 하며 상쾌하게 걸었다. 시상(詩想)은 몰라도 작업할 과제에 대한 부담감에서는 자유로워졌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예의 그 강골바람이 세차게 불어오기 시작했다. 빗발까지 날카롭게 내리치기 시작했다. 아직 편의점에는 도착하지도 못했는데, 그렇다면 거의 4km 가까이 걸어야 한다는 거고, 그 사이 옷은 온통 젖어 버릴 게 뻔했다.     


  그러나 설상가상은 이런 때 쓰는 말이었다. 갑자기 비는 눈으로 변했다. 멀리 산녘에 짙은 구름이 끼더니 비는 곧장 눈으로 변했다. 우산은커녕 가릴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이 그저 모자 하나 쓰고 30분 이상을 걸어야 했다. 다른 대책이 없으니 옷은 빨면 그만이라는 오기로 다그쳐 걷기만 했다. 그리고 흠뻑 젖은 채 정말 오돌돌 떨며 걸었다. 도둑나이가 시간을 도둑질당하는 것이라면, 강골바람은 체온을 빼앗아가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오한에 떨었다.



  밤이 되자 어둠이 아니라 휘날리는 눈발로 앞을 분별하기 어려웠다. 시골길 보안등 사이사이 함박눈은 반짝이는 햇살처럼 하얀 속살을 날렸다. 3월 하순의 폭설은 예버덩에 의탁한 문인들의 한밤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어쩌면 당연한 행동이지만 나는 그날 떨면서도 사진 찍기에 바빴다. 건물 여기저기는 물론 마당과 풀숲과 주천강까지 찍었다. 모두 하얀색이었다. 그렇게 서로 구별되지 않는 앵글을 한참 동안 촬영했다. ‘도둑나이 먹은’ 그도 그랬다는 것은 이튿날 아침 바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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