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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Dec 15. 2020

봄눈 오던 곳에 내리는 봄비

어느 현재주의자의 ‘길을 찾는 여행’ (37회)

“어미 새는 앞서서 힘든 삶을 언제나 먼저 겪는다”


  저 새다. 그날 아침 성당으로 가는 버스를 놓치게 만든 바로 그 ‘짐승’이다. 얼마 전 나는 새벽에 일어나 아침식사도 거른 채 안흥으로 가는 농어촌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봄 영하의 기온은 부실한 외투를 날카롭게 타박했고 주천강 물줄기는 무심하게 흘러 흘러가고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오직 버스만 집중해서 기다릴 것을, 나는 그날 그 순간 저 새들의 V자를 카메라로 찍겠노라며 한순간 정신을 팔았다가 하루 세 번밖에 다니지 않는 그 버스를 그만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다행히 예버덩문학의집 대표의 승용차를 얻어 타고 우여곡절 끝에 고해성사를 바치고 미사를 드렸지만, 저 새의 그 뻔한 집단 비행에 나는 너무 감격했었다.     



  새들의 비행 대형이 V자를 그리는 이유야 상승기류를 이용하기 위해서다 초대형 공중 추돌사고 방지를 위해서다 등 과학과 개그 사이를 오가며 많은 주장들이 있다. 우두머리와 집단 구성원들 사이의 위계라는 다분히 신분제적 이해도 있고, 대형의 선두와 후미는 수시로 교대하여 서로 체력 소모를 줄여준다는 공동체주의적 해석도 있다. 또한 다른 장치의 도움 없이는 결코 지상으로부터 이탈할 수 없는 인간에게 진정한 ‘고공의 자유’를 선사한다는 심미적 인식도 있다.     


  여기에 한 가지 이미지를 더한다. V자 대형의 꼭짓점에서 집단 비행을 이끄는 것은 다름 아닌 지치고 배고픈 어미 새라는 이미지다. 가장 앞서서 찬바람을 맞고, 제일 먼저 힘이 빠지는 가장(家長)의 이미지다. 어미 새와 가장 새는 언제나 앞서야 하고, 앞서기 때문에 가장 힘든 삶을 겪는다. 너무 가족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이미지인가. 그러나 가족을 위하여 짊어져야 하는 짐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은 언제나 가부장일 수밖에 없다. ‘가부장이 하는’이라는 동사는 언제나 ‘가부장’이라는 명사에 앞선다.     



  아무튼 그 다음 주에는 다시 낭패를 당하지 않기 위하여 더 일찍 일어났다. 버스를 놓치지 않겠다며 일어나자마자 결심한 것도 아무리 앵글이 예뻐도 사진일랑 작파하겠다는 거였다. 그런데 “아침 일찍 문상을 가야 하니 시간이 맞으면 성당까지 데려다 드리겠다.”는 문학의집 대표의 문자가 와 있었다. 그것은 횡재였다. 그리하여 이른 아침 도착한 성당 주변에서 ‘고공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새들을 다시 보았다. 저것들이 철새여서 장거리 비행을 예행하는 것인지, 텃새여서 아침식사를 위해 탐조 비행을 하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가부장적으로 해석했다. 어미 새는 평생의 지혜를 모두 부려 가장 맛있는 아침을 차리는 것이라고.     


  얼마 전 예버덩에는 봄눈이 내렸다. 그것도 많이 내렸다. “어둠이 아니라 휘날리는 눈발로 앞을 분별하기 어려웠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닷새 후 그곳 그 자리에 비가 왔다. 꽤 많이 왔다. 눈과 비 사이의 닷새는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런 비는 겨울과 봄 사이를 불가역적인 것으로 만드는 두꺼운 경계선인지 몰랐다. 그렇다면 비는 봄의 도착을 확증하는 비, 진짜 봄비였다.     


  가을에서 겨울로 갈 때에도 비가 온다. 가을비는 겨울을 맞는 사람들에게 찬바람과 추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 혹한의 계절을 견디는 자세를 가다듬게 한다. 마찬가지로 봄비는, 이제 꽃피는 계절이며 신록과 함께 자연의 순한 살결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려준다. ‘봄비 속에 떠난 사람’은 꼭 ‘봄비 맞으며 돌아’올 것 같고(작사 이희우•작곡 김희갑•노래 이은하, 「봄비」, 1979), ‘나를 울려주는 봄비’라도 겨울을 이겨낸 어떤 강인함을 느끼게 한다(작사 신중현•작곡 신중현•노래 박인수, 「봄비」, 1970).     



  그러나 이런 계절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계절은 태변하지 않는 법이다. 자본의 대물림만큼 가난도 대물림되며, 희망의 대물림만큼 고통도 대물림되는 게 현실이다. 혹한의 겨울이 고통의 표상만은 아니듯 초록의 새봄 또한 행복감만 주는 것도 아니다. 자연의 운행을 인간사에 비유하는 일이야 수천 년 내림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메타포라는 게 경험칙이다. ‘가장 앞서서 찬바람을 맞고, 제일 먼저 힘이 빠지는’ 것은 역시 어미 새라는 사실만 유구하다. 모여서 살 수밖에 없는 터무니없이 부실한 인간 공동체 내부에 항상적으로 존재하는 불일치와 불평등은 어떤 면에서는 자연의 규칙성에 버금가는 인간사의 법칙성이 아닌가 싶다.     


  신문과 방송은 계절에 상관없이 섬뜩한 사건사고를 연일 보도하며, 눈과 바람과 비와 상관없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아우성은 이 세상의 엄혹한 현실을 새삼 확인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겨울보다는 봄을 선호한다. 인간의 시각 능력에 부합하는 봄의 색채감은 물론이고 꽃들과 연초록 풀잎들이 자극하는 후각 정보는 사람들을 ‘올연(兀然)히’ 활기차게 만들어 준다. 심리적 효과일 뿐일지언정 우리는 겨울보다 봄에 더 강한 생명력을 느낀다. 그리하여 여전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루를 이어 하루를 사는 힘을 얻는다. 그러므로 봄은 봄이어도 늘 같은 봄은 아니다(春來不似春).     

  예버덩문학의집이 위치한 횡성군 강림면 일대는 응달마다 여전히 산의 어금니처럼 얼음이 하얗다. 닷새 전에 내린 눈은 이곳 얼음의 실재에 대한 강력한 근거였다. 구석진 곳에 웅크린 새하얀 어금니는 먼저 이곳이 강원도임을 표상하고, 또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깨끗한 순수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내리는 비로 하여 이제부터 그런 상징적 기능은 진초록 숲과 주천강 연둣빛 물줄기가 대신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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