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재홍 Dec 29. 2020

끝나도 끝난 건 아니다

어느 현재주의자의 ‘길을 찾는 여행’ (39회)

“‘자발적 갇힘’은 창조의 진정한 동력일지 모른다”


  속단 엄금, 끝나도 끝난 건 아니었다. 자연에 무슨 끝이 있으며 한계가 있을까만 아무래도 ‘맑은 날’의 판공성사를 운운한 것은 성급했다. 또 내리는 봄비를 두고 ‘겨울과 봄 사이를 불가역적인 것으로 만드는 두꺼운 경계선’이라고 표현한 것도 지나친 발언이었다. 3월도 하순에 들어 그처럼 폭설에 가까운 눈발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눈은 강골바람을 타고 사방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휘몰아쳐 내렸다.     


  기약한 시간이 다 되어가는 때라 아침부터 한 발짝도 나서지 못한 채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눈과 바람이 함께 내지르는 괴성에 가까운 소리는 여간만 자극적인 게 아니었다. 눈바람은 사방으로 소용돌이치다 나뭇가지를 뒤흔들다 나뭇잎을 날리고 창을 때렸다. 어떤 극한의 혼돈과 같았다. 루크레티우스(Lucretius, BC 94?-BC 55?)가 보았다면 분명 클리나멘(clinamen)의 실체화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눈은 세차게 내리면서 나의 성급한 판단을 매섭게 질타했다. 그러다 한 순간 눈부신 햇살이 눈 위로 내렸다. 쌓인 눈은 햇빛을 반사시켜 다시 세상을 온통 하얗게 만들었다. 천국의 이미지가 있다면 꼭 그럴 것 같은 흰 색이었다. 언제 그랬나 싶게 하늘은 하늘색으로 맑아졌고, 눈은 또 빠르게 녹기 시작했다. 건물 곳곳 처마 같은 데서 녹은 눈은 빗물처럼 뚝뚝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한치 앞을 볼 수 없게 쏟아지던 눈발과 맑디맑은 청량한 하늘은 불과 한 시간 시차를 두고 이어졌다. 대자연의 운행을 어찌 함부로 판단하랴. 그저 기다리고 받아들이는 일만이 사람의 몫인 것을. 운 좋게도 한두 시간 만에 두 계절과 두 기운을 모두 누릴 수 있었으니 그것은 이 세상 행복이었다?    



  새봄의 파종을 앞두고 밭에 거름을 뿌리던 농부들에게사 유익했는지 무익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제설차 인부들은 졸지에 바빠졌을 것이다. 고개를 넘어가는 한적한 지방도로의 가파른 기울기는 그들의 제설 작업을 재촉하였을 것이다. 농부든 제설 작업자든 자연의 운행을 예측할 수 있다면 여간 유익하지 않겠지만, 작업실에 틀어박혀 컴퓨터 모니터에 띄운 원고들과 씨름하던 사람만 횡재한 듯 행복감까지 누렸다.     


  예정된 치과 치료와 몇 가지 용무 때문에 서울을 다녀와야 했다. 안흥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표는 오직 당일에 현금으로만 구입할 수 있다. 안흥찐빵을 파는 본업을 가진 노부부에게 매표를 위탁한 탓이었다. 그래서 서울행 버스표 구입은 다소 불안했다. 돌발 상황은 언제 어디서나 생길 수 있다. 지난번에는 서울에서 일을 마치고 아침부터 서둘러 터미널로 갔는데 그만 버스표가 매진되었었다. 그 차를 타지 않으면 도착해서 몇 시간을 더 기다려서야 농어촌버스를 탈 수 있기 때문에 여간 손실이 아니었다. 승용차로 두 시간도 안 걸리는 곳을 6시간 이상 들여야 도착할 수 있다는 거였다.      



  가령 ‘자승자박’이란 이런 것이다. 하행 차표를 인터넷으로 예약해 두면 안심할 수 있는 대신 그 출발 시각에 매이고 만다. 전날 저녁 갑자기 아주 좋은 아이템이라며 자문을 구하고 싶다는 후배가 있었지만 다음날 버스 시간 때문에 만나서 충분히 상담해 줄 수 없었다. 급할 것 없는 나로서는 다른 날 보자고 하면 되기도 하고,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표를 환불하면 되었지만 그 사이의 수없이 어정쩡한 상황에서 나는 버스표에 얽매이고 말았다.     


  치과 치료도 마찬가지였다. 병원으로서는 진료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좋고 환자는 귀한 시간 줄서서 기다리지 않아도 좋으니 진료예약제는 피차간 장점이 많다. 하지만 그날 나는 모 부동산에서 아파트 매매 계약을 체결하고 있었다. 집은 무거운 물건이고 살 때도 팔 때도 큰돈이 오가는 일이며 매도인과 매수인과 중개인은 계약서와 등기부등본 등 서류를 챙기고 확인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런데 한 순간, 예약 시각이 임박했음을 깨달았을 때의 그 당혹감이란. 예약일자를 변경하면 그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예버덩의 작업실에 와 있으니 자칫하면 1주일을 아프게 기다려야 치료받을 수 있다는 거였다. 서둘러 계약금을 지급한 뒤 더 서둘러 치과로 향했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배부른 노예’니 뭐니 했지만 사실 직장이란 자신의 자유를 담보로 안정된 생계를 보장받으려는 체계이다. 개인의 창의성을 실현하는 수단이 직장이라는 말도 있다지만, 그것은 노예의 삶을 권유하는 각종 이익집단의 유혹 수단일 뿐이다. 창의성 실현을 굳이 조직의 틀에 갇혀서 조직의 필요에 맞출 필요는 없다.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직장이 아니라 어떤 의무감에 따라 끌려 다니는 직장이라면 그곳은 감옥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예매와 예약과 직장은 모두 자승자박인가. 자유를 담보로 편의와 복리를 추구하는 자충수? 그렇기야 하겠는가. 자승자박이나 자충수라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면 완전히 달라진다. 스스로 계획을 짜고 거기에 갇히는 일이라면 진정한 생산의 동력이 될 것이다. 어쩌면 무계획이야말로 자유의 상실이자 창의성의 낭비일지 모른다. 계획 없는 인생이란 참 갸륵하다. 일상에서나 문학에서나 타자에 의한 갇힘만 아니라면 자신을 가둘 필요가 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끌려 다니지만 않는다면 ‘자발적 갇힘’은 창조적 개인의 활로가 된다. 그렇다면 예버덩문학의집 이후에도 나는 나의 노예가 되어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맑은 날의 ‘판공성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