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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Sep 20. 2021

김상용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

우리 문학 이렇게 읽기 (9)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 ‘한참갈이’, 소로 잠깐이면 갈 수 있는 작은 논밭의 넓이.     


- 김상용(1902-1951), 「남으로 창을 내겠소」 전문     



  한 편의 시에서 시인이 의도한 바와 독자가 이해한 것 사이에는 언제나 불일치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불일치는 그 자체로 인간 언어활동의 한 양상이자 시적 소통의 본질을 구성한다. 시 수용의 독립성을 적극적으로 규정할 때 시인은 창작자만 아니라 독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 작품의 제 1독자로서의 시인과 제 2독자들 사이에서 진동하는 시적 의미의 다양성은 문학적 향유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된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에서 우선 중시되는 시어는 ‘남’이다. ‘남’은 남쪽이다. 조사 ‘으로’는 ‘남’이 방위 또는 방향임을 지시하고, ‘창(窓)’도 ‘내겠다’도 그것을 지시한다. ‘남쪽’은 일차적으로 가치중립적인 방향을 의미하지만 ‘아래’ 혹은 ‘내려감’의 사회학적 의미로 확장 가능하다. 그것은 ‘낙향’, ‘귀향’, ‘회귀’ 등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버림’, ‘내려놓음’을 거쳐 그 끝은 ‘무욕(無慾)’의 윤리적 차원에 도달한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인의 발언이 윤리적 차원에까지 이른다는 것은 세속적 가치와 상반된 것을 부정하지 않는 데서 확인된다. 한참갈이 작은 밭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소유의식과 괭이질과 호미질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노동의식이 그렇다. 무엇보다 ‘구름’으로 상징되는 높고 밝고 빛나는 것들의 ‘꾐’(유혹)에 이끌리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와 새들의 지저귐을 ‘공짜로’ 노래로써 듣는다는 표현은 시인의 초탈한 태도를 보여준다.


  또 거친 음식이지만 ‘옥수수’라도 익으면 ‘함께’ 나눠 먹겠다는 표현은 무욕과 초탈의 자세가 개인적 안락에 그치지 않고 이웃과 지인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임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남으로 창을 내겠다’는 시인의 태도는 자연에 대한 절대적 옹호라는 맥락의 자연주의와는 다르다. 시인은 어디까지나 무욕과 안분지족의 삶에서 현세간의 탈출구를 찾는 윤리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는 명령형의 작품도 아니지만 고백형의 작품도 아니다. ‘내겠소’, ‘들으랴오’, ‘좋소’ 등 1인칭 시적 화자의 고백체를 외형으로 갖고 있지만, ‘무욕의 윤리성’ 자체가 일정한 사회적 맥락 위에 성립한다는 점에서 내용상 청유형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누가 ‘왜 그러게 사느냐’고 힐난조로 묻는다면, 그냥 ‘웃음’으로 답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남으로 창을 낸 전원의 오두막에서 작은 밭을 갈며 살아간다는 ‘입상’을 통해 무욕과 안빈의 윤리적 삶을 옹호하는 ‘진의’를 함축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창작자이자 제 1독자인 김상용의 의도가 어떤 것이었든 이 작품은 거대 도시의 집적된 욕망의 스펙트럼 속을 살아가는 제 2독자들인 현대인에게 탈출구로서의 원형적 삶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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