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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Sep 30. 2021

만해 한용운의 시 세 편

우리 문학 이렇게 읽기 (10)

"‘기룬 어린 양을 향한 의 절대적 사랑"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시집 『님의 침묵』 서두에 「군말」을 적어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님’만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라고 했다. 한용운에게 님은 무엇보다 우선 ‘어린 양’이었던 셈이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 양의 이미지가 은유적 보편성을 얻을 수 있느냐와 별개로 만해의 ‘어린 양’은 나라를 빼앗긴 채 고통을 겪고 있는 연약한 민초를 표상한다. 신약성경 ‘되찾은 양의 비유’에 등장하는 양과 마찬가지로 만해에게도 ‘어린 양’은 ‘님’이자 기룬 대상이었다.


  그립다의 전라도 방언으로 검색되는 ‘기룹다’는 그리움, 애틋함, 애처로움 등의 어의를 두루 갖춘 말로 선사(禪師)인 그가 왜 불립문자(不立文字)가 아니라 언어로써 ‘님의 침묵’을 표현해야 했는지 말해 준다. 그것은 ‘어린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마음이며, 산중에서도 세속의 유마거사처럼 중생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대승적 보살도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만해는 또 「독자에게」에서 “독자여 나는 시인으로 여러분의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합니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독자가 “나의 시를 읽을 때에 나를 슬퍼하고 스스로 슬퍼할 줄 알”기 때문이라면서 ‘기룬 어린 양’을 위해 시를 적었으나 독자와 독자의 자손에게까지 읽힘으로써 ‘슬픔’이 전수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만일 그렇게 읽히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그것은 ‘늦인 봄의 꽃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서 코에 대이는 것’과 같을 것이라며 “새벽종을 기다리면서 붓을 던”진다고 마무리했다(1925. 8. 29). 요컨대 슬픔은 자기 당대에 그쳐야 한다는 바람이었다.


  「군말」과 「독자에게」를 통해 만해가 말하고자 한 바를 이처럼 시대적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결할 수 있다면, ‘님’과 ‘당신’의 의미도 ‘기룬 어린 양’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 그의 뜻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님’과 ‘당신’이 종교적 절대자이든, 국가와 민족이든 그것은 일차적으로 어린 양을 보듬고 품고 위무하는 존재이다. “‘님’만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라고 말한 대로 만해에게는 어린 양도 분명히 지극한 기룸의 대상이다.


  이런 맥락에서 ‘환락의 마음’과 ‘고통의 마음’ 모두를 빼앗아가는 「요술」의 ‘당신’과 ‘사라지는 거문고 소리’를 따라 안타깝게도 ‘아득한 눈을 감는’ 「거문고 탈 때」의 ‘당신’,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라며 꾸짖다 거문고 줄의 완급(緩急)조차 잃을지 모르는 「사랑의 끝판」의 ‘님’은 모두 어린 양을 보듬고 품고 위무하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시의 화자는 모두 어린 양이 된다. 부실하고 부족하고 근심하고 바쁘게 안달하는 각각의 화자들은 모두 어린 양과 같은 존재이다.


  「요술」의 화자는 환락도 고통도 없이 오직 ‘당신’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하는 어린 양이고, 「거문고 탈 때」에서는 마지막 거문고 소리가 사라질 때 ‘사라지는 당신’을 안타까워하는 어린 양이다. 또 「사랑의 끝판」의 화자는 ‘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하지 못하고 바쁘기만 한 자신을 게으르다고 자책하는 어린 양이다. 때문에 「요술」에서 ‘지금의 이별’은 결코 ‘사랑의 최후’가 아니며, 「거문고 탈 때」의 ‘당신’은 거문고 소리와 함께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끝판」의 ‘님’도 결코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끝판 왕’이다.     


  가을 홍수가 작은 시내의 쌓인 낙엽을 휩쓸어가듯이 당신은 나의 환락의 마음을 빼앗아 갔습니다. 나에게 남은 마음은 고통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원망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이 가기 전에 나의 고통의 마음을 빼앗아 간 까닭입니다.

  만일 당신이 환락의 마음과 고통의 마음을 동시에 빼앗아 간다 하면 나에게는 아무 마음도 없겠습니다.     

  나는 하늘의 별이 되어서 구름의 면사(面紗)로 낯을 가리고 숨어 있겠습니다.

  나는 바다의 진주가 되었다가 당신의 구두에 단추가 되겠습니다.

  당신이 만일 별과 진주를 따서 게다가 마음을 넣어 다시 당신의 님을 만든다면 그때에는 환락의 마음을 넣어 주셔요.

  부득이 고통의 마음도 넣어야 하겠거든 당신의 고통을 빼어다가

넣어주셔요.

  그리고 마음을 빼앗아 가는 요술은 나에게는 가르쳐 주지 마셔요.

  그러면 지금의 이별이 사랑의 최후는 아닙니다.

- 「요술」 전문   


  「요술」의 1연에서 ‘당신’은 환락의 마음과 고통의 마음을 모두 빼앗아갔다. ‘환락’과 ‘고통’은 시적 화자의 마음을 대변하는 일종의 대칭적 단순화이며 대유법이 구사되었다. 여기서 ‘환락’의 직접적인 의미는 기쁨이나 즐거움이지만 윤리적인 맥락의 부정적 뉘앙스도 포함하고 있다. ‘당신’은 ‘가을 홍수’의 세찬 물길처럼 형형색색 환락의 낙엽도 휩쓸어갔지만, 그때 고통의 마음까지 빼앗아감으로써 화자에게는 무욕(無慾)의 상태와 같이 아무 마음도 없게 되었다. 1연의 색조는 홍수에 휩쓸리는 낙엽의 오색(五色)이며, 그 속도는 마음까지 빼앗아갈 정도의 초고속이다. 때문에 화자는 ‘당신’으로 인해 지극한 평정의 상태에 도달한 느낌을 준다.


  2연에서 ‘나’는 별이 되어 숨었다가, 진주가 되어 ‘당신의 구두에 단추’가 되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여기서 시는 상황의 반전을 일으킨다. 1연에서 ‘당신’이 가져간 환락과 고통의 마음을 ‘나’에게 그대로 넣어달라고 한다. ‘당신’이 ‘나’를 위해 가져갔던 환락과 고통을, 이제 별과 진주가 된 ‘나’에게 그대로 넣어달라고 한 것이다. 나아가 그런 마음을 빼앗아 가는 ‘요술’은 아예 가르쳐 주지 말라고 한다. 환락과 고통이라는 세간의 표상들은 ‘당신’이 아니라 ‘나’에게 두어달라는 간절한 바람이다.


  이렇게 「요술」은 ‘당신’과 ‘나’ 사이에서 환락과 고통의 마음이 순환하는 의미론적 고리를 형성함으로써 절대적 사랑을 완성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지금의 이별’은 결코 ‘사랑의 최후’가 아닌 것이다.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은, ‘나’를 향한 ‘당신’의 마음과 같이 이토록 지극하다. 이 작품에서 ‘높은 하늘’의 별과 ‘깊은 바다’의 진주는 공간적으로도 온 세계를 대유하지만, 정서적으로도 화자의 마음을 대유한다.


  그러나 환락과 고통의 마음을 순환 고리로 한 ‘당신’과 ‘나’의 영원한 사랑에는 존재론적 우열이 존재한다. ‘당신’은 마음을 빼앗아갈 수도 있고 다시 넣어줄 수도 있는 일차적 존재이자 능동적 존재이지만, ‘나’는 오직 바랄 수밖에 없는 이차적 존재이자 수동적 존재이다. 화자인 ‘나’의 이런 존재론적 위상은 「요술」이 함축하고 있는 간절함과 절실함의 정서적 질감을 심화시키는 기제가 되고 있다.     


  달 아래에서 거문고를 타기는 근심을 잊을까 함이러니, 춤 곡조가 끝나기 전에 눈물이 앞을 가려서 밤은 바다가 되고 거문고 줄은 무지개가 됩니다.

  거문고 소리가 높았다가 가늘고 가늘다가 높을 때에 당신은 거문고 줄에서 그네를 뜁니다.

  마지막 소리가 바람을 따라서 느티나무 그늘로 사라질 때에 당신은 나를 힘없이 보면서 아득한 눈을 감습니다.

  아아, 당신은 사라지는 거문고 소리를 따라서 아득한 눈을 감습니다.

- 「거문고 탈 때」 전문     


  이 작품의 화자는 달밤에 거문고를 타고 있다. 그(녀)가 잊고자 하는 근심이 무엇인지 제시되지는 않았지만, ‘춤 곡조’가 채 ‘끝나기 전’에 눈물이 쏟아져 “밤은 바다가 되고 거문고 줄은 무지개”가 될 정도로 극심하다. 차창에 떨어진 빗물이 세상을 어른거리게 만들듯이 눈동자에 맺힌 눈물로 인해 세상은 온통 물속(‘바다’)처럼 보이고, 그런 눈으로 보는 거문고 줄은 달빛 속에서 무지갯빛으로 보인다는 시각적 이미지가 예리하게 번뜩인다. 시각 이미지가 근심과 슬픔의 정서를 한결 심화시키고 있다.


  거문고를 탈 때 ‘당신’은 그 소리의 높낮이 위에서 그네를 타듯 왕림한다. 거문고 소리가 높아진다는 것은 음계를 따라 줄을 깊이 누르고 튕긴다는 것이고, 가늘어진다는 것은 가볍게 누르고 튕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리의 높낮이는 근심을 잊기 위해 거문고를 타는 화자의 신체 운동의 역동성을 반영하는 것이고, 그 소리의 진폭에 따라 ‘당신’이 ‘그네를 뛴다’는 것은 그런 운동(연주) 속에서 위안을 얻는다는 말이 된다. 거문고를 타는 신체적 운동이 소리를 낳고, 그 행위와 소리의 이중적 조화 속에서 ‘당신’의 사랑이 확인된다.


  때문에 거문고의 마지막 소리가 일개 음파가 되어 “느티나무 그늘로 사라질 때” ‘당신’은 그 줄어드는 강도만큼 ‘힘없이’ 아득하게 눈을 감는 것처럼 느껴진다. ‘당신’은 거문고 소리와 함께 와서 그 소리와 함께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화자의 ‘근심’도 거문고 소리와 함께 오고간다. 그런 점에서 「거문고 탈 때」는 신체적 운동이라는 촉각과 소리라는 청각, 눈물이라는 시각이 매우 역동적으로 운용된 작품이다.


  작품 전반에 구사된 경어체와 함께 화자의 내면적 근심과 슬픔의 정서가 거문고를 타는 신체와 소리의 진동과 눈물로 혼연일체가 되어 작품에 비장미를 더하고 있다. “아아, 당신은 사라지는 거문고 소리를 따라서 아득한 눈을 감습니다.” 이런 바탕 위에서 독자들은, 물리적으로 너무나 자연스러운 ‘사라지는 소리’에 대하여 “아아” 하며 안타까워하는 화자의 정서에 공감하게 된다.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

  에그 등불을 켜려다가 초를 거꾸로 꽂았습니다그려. 저를 어쩌나

  저 사람들이 흉보겠네.

  님이여, 나는 이렇게 바쁩니다. 님은 나를 게으르다고 꾸짖습니다. 에그 저것 좀 보아,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하시네.

  내가 님의 꾸지람을 듣기로 무엇이 싫겠습니까. 다만 님의 거문고 줄이 완급을 잃을까 저어합니다.     

  님이여, 하늘도 없는 바다를 거쳐서 느릅나무 그늘을 지어 버리는 것은 달빛이 아니라 새는 빛입니다.

  홰를 탄 닭은 날개를 움직입니다.

  마구에 매인 말은 굽을 칩니다.

  네 네 가요, 이제 곧 가요.

- 「사랑의 끝판」 전문     


  「요술」과 「거문고를 탈 때」뿐만 아니라 만해의 많은 작품들이 경어체를 사용하고 있지만, 「사랑의 끝판」에 구사된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처럼 한결 구어체적인 표현이 등장한 작품은 많지 않다. 그런 만큼 이 작품의 분위기는 생동감으로 가득하다. 구어체의 직정성은 “에그 등불을 켜려다가 초를 거꾸로 꽂았습니다그려. 저를 어쩌나 / 저 사람들이 흉보겠네.“와 같은 후속 시행으로 이어져 ‘나’의 일상적•현실적 위치와 층위를 달리 하는 ‘님’의 존재론적 위상을 더욱 높게 보이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허둥대는 ‘바쁜 나’를 ‘바쁜 것이 게으른 것이다’ 하며 준엄하게 꾸짖는 ‘님’의 일견 모순적인 언어를 납득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지극히 높은 ‘님’의 존재론적 절대성 앞에서 ‘바쁨’과 ‘게으름’의 상반성은 해소되고 만다. 일상의 바쁨은 부지런함이 아니라, ‘님’을 향한 외길을 지체시키는 게으름이 될 수 있다는 자각으로 이어진다. ‘님’ 앞에서는 어느 무엇도 결코 중시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게으름 탓에 ‘님’이 거문고 줄의 완급을 잃어버릴까 저어하게 된다.


  ‘나’와 ‘님’의 이런 위상차로 인해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라는 표현은 매우 적실해진다. ‘님’을 향해서라면 ‘나’는 언제나 횃대 위에서 날개를 파닥이는 닭과 같고, 줄에 매여서도 발굽을 쳐대는 말과 같다. ‘님’을 향해서 ‘나’는 언제나 조바심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나’는 영원히 게으른 자이다. ‘사랑의 끝판’은 종결이나 파국이 아니라 ‘님’과의 완전한 만남이자 사랑의 절대적 완성을 의미한다.


  「사랑의 끝판」은 한밤에도 ‘님’을 향한 충실한 열정을 그칠 수 없는 ‘나’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린 작품이다. 그것은 시의 처음과 끝을 ‘네 네 가요, 지금/이제 곧 가요.’로 반복한 데서도 드러난다. 이는 ‘님’을 향한 사랑의 절대성을 형태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믿음’의 일방적 성격과 달리 ‘사랑’을 상호적인 관계의 문제로 정의할 수 있다면, 「요술」과 「거문고를 탈 때」, 「사랑의 끝판」에서 화자가 보여주는 모습은 확실히 상호적이다. 「요술」의 ‘당신’은 환락과 고통의 마음을 빼앗아가지만, ‘나’는 그 마음을 다시 넣어달라고 말한다. 환락과 고통을 ‘당신’이 아니라 ‘나’에게 넣어달라는 마음이야말로 ‘당신’과 ‘나’사이의 상호적 사랑(순환 고리) 자체이다. 「거문고를 탈 때」의 ‘당신’과 ‘나’는 소리와 함께 그 위에서 서로 어울린다(혼연일체). 「사랑의 끝판」에서 ‘님’과 ‘나’는 완전한 만남이자 사랑의 절대적 완성을 추구한다(존재론적 위상차).


  ‘님’을 향한 절대적 사랑의 맥락에서 세 작품은 상호성이라는 공통의 지반 위에 서 있다. 그렇다면 ‘님’도 일방적인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나’를 향한 절대적 사랑을 함축하고 있는 존재이다. 내가 향하는 사랑이 곧 나를 향한 사랑으로 돌아오는 상호성이라는 점에서 세 작품은 ‘기룬 어린 양’을 향한 ‘님’의 절대적 사랑을 표현한 작품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만해 한용운의 시적 특질 가운데 하나로 짐작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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