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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Aug 30. 2021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이부탐춘」(嫠婦耽春)

우리 문학-그림 이렇게 보기(7)

과부, 봄을 탐하다

      





 이부(嫠婦)는 글자 그대로 ‘과부’다. 탐춘(耽春)은 ‘봄을 즐긴다’는 뜻이니, 신윤복의 「이부탐춘」은 지아비를 잃은 어느 여인이 봄날을 즐긴다는 의미의 역설적인 제목이다. 남편과 사별한 여인이라고 하여 봄을 즐기지 못할 것은 없지만, 굳이 ‘이부’를 제목에 사용한 것은 그녀의 봄이 적어도 어떤 불완전한 상태임을 시사한다. 그것은 남편의 부재로 인해 겪게 되는 인간적 고뇌와 사회적 억압을 함축한다.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여성에게 재혼은 허용되지 않았다. 일부종사를 원칙으로 남편을 잃은 불행한 과부에게는 평생을 수절해야 한다는 사회적 억압이 가해졌다. 열녀문이 세워지고, 열녀의 이야기가 통용되던 시대의 과부는 그 억압 속에서 성적 고통과 인간적 고뇌를 겪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이부탐춘」은 ‘즐기는’ 이부의 외면적 상황을 통해 ‘즐기지 못하는’ 과부의 내면적 표정을 그린 역설적 의미의 작품이다.


 먼저 화면 좌측 위에 다소 거칠게 보이는 나뭇가지 사이로 연분홍 꽃들이 만개했다. 잎보다 먼저 꽃이 피는 벚나무로 보이는데 마치 두 여인의 머리께로 손을 뻗는 듯 꽃가지는 담장을 넘었다. 이 그림에서 벚꽃은 계절을 표상하는 유일한 소재이자 동시에 뭇 생명이 약동하는 봄의 활기를 나타내는 이미지로 작용하고 있다. 다른 소재들보다 한결 짙은 먹색으로 운필한 나뭇가지의 성긴 듯 불규칙하고 강렬한 율동감은 마치 여인들을 유혹하는 손짓인 듯하다.


 벚나무는 화면 구성상으로도 좌측 중앙부터 직각삼각형 모양으로 점점 작아지면서 중앙부까지 연결돼 매우 튼튼하게 구축된 담장과 더불어 그림 전반에 아늑함과 안정감을 더해 주고 있다. 벚나무가 넘어 온 좌측 담은 기와를 얹은 지붕이 그려져 있어 그 높이를 가늠할 수 있는데 반해 중앙 상단부터 우측단까지는 석재의 사각형 모양이 끝까지 채워져 있는 높이조차 가늠할 수 없게 만들었다. 여인의 처소인 안채나 별당에 딸린 뜰은 담장 밖에서 아무나 함부로 엿볼 수 없어야 하며, 반대로 밖에서 벌어지는 세상사에 대해서는 안에서도 무심해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화면 중앙부 하단에는 누렁이와 바둑이가 서로 엉덩이를 맞댄 채 한창 교미를 하고 있다. 신윤복은 두 마리를 상당히 정교하게 그렸다. 누렁이와 바둑이로 선택한 것도 색감 구성과 특색 측면에서 우연한 일로 보이지 않으며, 두 짐승의 동작과 표정도 상당히 세밀하다. 고개를 돌려 바둑이를 보고 있는 누렁이의 모습과 그저 앞만 보고 있는 바둑이의 모습은 대비되며, 꼬리를 든 누렁이와 사타구니 사이로 끼워 넣은 바둑이의 모습도 대비된다. 모두 화가의 예민한 취사선택의 결과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개 두 마리가 흘레붙고 있는 화면 바로 위로 작은 새들이 보인다. 마당에 앉은 두 마리는 포개져 있어 이들도 교미 중인 듯하고, 다른 한 마리는 바로 위해서 막 내려앉으려고 하는 사랑의 경쟁자처럼 보인다. 땅에 앉은 새들의 교미와 이에 접근하는 새의 활짝 펼쳐진 날갯짓이 박진감을 더한다. 개들과 새들 사이로 마당의 색은 좀 더 밝은 구역과 그렇지 않는 부분으로 나뉜다. 밝은 구역을 따라 왼쪽 담장 아래에는 구멍이 나 있어 이곳으로 짐승들이 자주 드나들어 색깔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혹시 모를 일이다. 어느 캄캄한 밤 두건을 쓴 장정이 기어서 드나들었을지도.


 그런데 신윤복은 바로 이 구멍 위 담벼락에 자신의 호를 쓰고 낙관을 찍었다. 그 높이는 벚나무와 개들의 위치 중간쯤에 해당하고, 여인들의 시선의 높이와 맞물린다. 화가의 영혼이 마치 그곳을 통해 과부의 처소를 무시로 드나들었다는 듯이, 그럼으로써 수절 과부의 내면까지 확연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듯이. 그런 점에서 ‘혜원’이라는 호를 적은 위치는 화면 구도 상으로도 적절하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는 화가의 작의까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복합적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화면 우측에는 거의 수평으로 쓰러질 듯한 소나무 앞에 두 여인이 서 있다. 한 여성은 트레머리에 완전히 하얀 소복(素服)을 입었고, 다른 여성은 댕기머리에 하늘색 치마를 입었다. 그렇다면 ‘이부’는 트레머리 여성이다. 댕기머리는 이 여성과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으나, 작품의 구성으로 보아 적어도 꺼리는 사이는 아니다. 대낮에 흘레붙은 개를 서로 불편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사이라야 하기 때문이다. 댕기머리의 단정한 복색과 과부의 치맛자락을 붙잡은 오른손으로 보아 하녀나 몸종은 아닌 듯하다.


 두 여인은 서로 꺼리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처지가 비슷한 것도 아닐 터다. 과부는 허리를 다소 구부정하게 굽혀 오른손은 나무에 기댄 듯하고, 두 다리도 팔자로 벌려 전반적으로 피곤하거나 무기력한 상태라는 느낌을 준다. 반대로 댕기머리 처녀는 왼다리에 힘을 준 채 꼿꼿이 서서 한 손은 과부의 치맛자락을 잡고, 다른 손은 곧게 내려뻗은 채 손등을 밖으로 펼쳐 어떤 긴장 상태임을 보여준다. 과부의 저고리는 풍성한 듯 흘러내리는 듯하지만 처녀의 그것은 어깨 폭을 알 수 있을 만큼 폭이 좁고 팽팽하다. 과부의 소복 치맛단은 앞으로 불룩하고, 처녀의 푸른 치맛단은 뒤쪽으로 풍성하다.


 두 여인은 지금 나란히 붙어 서서 같은 곳을 보고 있지만, 머리도 다르고 복색도 다르고 자세도 다르다. 둘은 짐승들의 교미 장면을 함께 주시할 수 있을 정도로 거리낌 없는 사이지만, 내면은 매우 대비된다. 트레머리의 입 모양은 동그랗게 모아져 살짝 웃는 듯하고, 댕기머리의 입은 굳게 다물어졌다. 과부의 눈 모양과 얼굴은 전반적으로 밝아 보이고, 처녀는 어깨를 움츠리고 왼손바닥에 헛심을 쓴 채 긴장한 듯 보인다. 과부가 개의 흘레 장면을 재미난 구경거리로 생각한다면, 처녀는 ‘애고머니, 망측해라’ 하며 꺼리는 듯하다.


 한편 여인들이 서 있는 소나무의 모양새는 왠지 자연스럽지 않다. 어쩌면 두 여성의 몸에 가려졌을 수 있으나 받침대도 없이 극단적으로 기울어져 있다. 잔가지 두 개가 남아 있으니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죽어가는 나무인 듯 우듬지 부분이 꺾여 있다. 표면이 울퉁불퉁한 것으로 보아 사람의 손이 아니라 세찬 비바람이나 폭풍을 맞은 듯도 하다. 어쩌면 잔가지는 수절 과부의 상처받은 가녀린 심사로, 죽어가는 꺾인 나무는 인간적 욕망을 차단당한 한 여성의 비운의 삶을 표현하는 듯하다.


 때는 벚꽃이 만개한 봄이다. 안뜰에 갇힌 과부와 그의 지인은 죽어가는 소나무에 기대 한창 흘레붙은 개를 바라본다. 그 옆에서 새들도 교미 중이다. 댕기머리 처녀야 속은 몰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민망한 듯 부끄러운 듯 몸을 움츠리지만, 사회적 억압과 인간적 고뇌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과부에게는 재미있으면서도 한탄스러운 한 순간이다. 한갓 미물들도 때가 되면 사랑을 나누는데, 살아서는 정을 통할 수 없는 신세가 처량하기만 하다.


 흐드러진 봄을 ‘즐기는’ 과부의 결코 ‘즐기지 못하는’ 운명을 통해 신윤복이 하고자 말은 무엇일까. 작품이 담고 있는 역설적 의미는 명확하지만, 그렇다고 가부장제에 대한 명시적인 비판이나 페미니즘적 주장을 담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불운한 과부의 내면에 드리워진 고통의 심사에 대해 깊이 연민한 것임은 사실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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