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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Aug 19. 2021

마종기의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우리 문학 이렇게 읽기(6)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경상도 하회 마을을 방문하러 강둑을 건너고

강진의 초당에서는 고운 물살 안주 삼아 한잔 한다는

친구의 편지에 몇 해 동안 입맛만 다시다가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향기 진한 이탈리아 들꽃을 눈에서 지우고

해 뜨고 해 지는 광활한 고원의 비밀도 지우고

돌침대에서 일어나 길 떠나는 작은 성인의 발.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피붙이 같은 새들과 이승의 인연을 오래 나누고

성도 이름도 포기해버린 야산을 다독거린 후

신들린 듯 엇싸엇싸 몸의 모든 문을 열어버린다.

머리 위로는 여러 개의 하늘이 모여 손을 잡는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보이지 않는 나라의 숨,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말,

먼 곳 어렵게 헤치고 온 아늑한 시간 속을 가면서.  


* 신약, 「로마서」 8,24.


- 마종기(1939- ),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전문       



  꼭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맥락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매일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서둘러 와 주기를 바라고, 보이지 않는 것이 눈앞의 현실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심지어 보이는 것도 바란다.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 철저한 상실과 부재의 세계를 사는 것일까.     


  ‘먼 곳’을 어렵게 헤치고 나온 시인은 지금, ‘보이지 않는 나라’의 숨을 보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말’을 듣는다. 그 아늑한 시간을 위해 시인은 앞서 ‘향기 진한 이탈리아 들꽃’을 눈에서 지우고, ‘해 뜨고 해 지는 광활한 고원의 비밀’도 지우고, 마침내 모든 것을 지우고 ‘몸의 문’을 열어 버렸다. 그리고 시인은 이 대목에서 ‘돌침대에서 일어나 길 떠나는 작은 성인’이 된다. 그러니 ‘머리 위로는 여러 개의 하늘’이 모여 손을 잡는 것이다.     


  모든 것을 지우고, 모든 몸의 문을 열어 버리는 성인과 달리 우리는 매일 무엇인가를 가지려 하고 무엇인가가 주어지기를 바라며 산다. 때문에 우리는 ‘꿈을 믿고 싶다면, 꿈을 믿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길몽을 믿고 싶은 만큼 악몽을 믿지 않겠다는 다짐은 날마다 우리를 보이지 않는 금기의 울타리 속에 가둔다. 그러므로 무엇인가를 바라는 마음은 고아한 천상은 아닐지라도 일상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고 겸손하게 만든다.


  사람에 대하여 정의하는 갈래야 이러쿵저러쿵 무수히 많지만 여기에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은 ‘바라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우리는 오늘도 바람의 실현을 꿈꾸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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