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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Aug 10. 2021

이시영의 「단순한 기쁨」

우리 문학 이렇게 읽기(5)


"설마 단순한 기쁨이겠는가"



어느 여름날 백양나무 그늘 아래서

검정 치마 흰 저고리 차림의 처녀 선생님으로부터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를 배울 때

느릿느릿 날개를 접고 날으던 나비 그림자며

괜히 퉁방울눈을 뜨고 울어제끼던 매미 울음소리며

그리고 그 위의 한가한 구름이랑                         

- 이시영(1949- ), 「단순한 기쁨」 전문



  가을 운동회들은 모두 끝났을까?     


  흙바닥 운동장 조회대 맞은편에 합판으로 만든 아치를 세우고, 하늘에는 만국기 갈바람 날쌔게 휘돌아 펄럭이는 국기들 사이로 청군과 백군은 모자를 쓰고 혹은 머리띠를 매고 행진을 하였다. 철봉과 평행봉과 시소와 그네가 있는 운동장 뒤편에 나란히 앉아 삼삼칠 박수를 치던 날, 그날은 공장에 나가던 아버지도 들일을 나가던 어머니도 놀고 싶은 형도 어린 누이도 우리 학교엘 왔었다.     


  생각난다. “보아라, 이 넓은 운동장에 청군과 백군이 싸운다. 청군과 백군이 싸우며는 보나마나 우리 편이 이기지.”라는 노래.     


  또한 생각난다. 어느 초가을 오후 수업을 작파하고 학교 뒷동산에 올라가 바라보던 하늘, 그 하늘 아래 한 어린 청년은 벤치에 누워 괜히 울적하고 막막하고 뿌듯하고 의기양양해져서 하루를 아주 길게 살았었다.     


  설마 ‘단순한 기쁨’이겠는가. 검정 치마 흰 저고리 차림의 처녀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시던 「광복절 노래」,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는 그 노래의 경쾌한 가락과 힘차고 씩씩한 기상이 설마 ‘단순한 기쁨’이겠는가.     


  이 시의 화자는, 어린 시절 풍경을 돌이켜 보고 싶은 나이에 이른 중년의 언어적 흐름을 보여준다. 한 순간 한 장면 한 사건에 대한 감상적 비유와 날렵한 표현욕을 자제할 줄 아는 중후한 언어가 읽는 이의 마음을 더욱 시리게 한다.


  어쩌면 좋은가. 벌써 이만큼 와 버린 것을. ‘느릿느릿 날으던’ 나비랑, ‘퉁방울눈을 뜬’ 매미랑, ‘그 위의 한가한 구름이랑’ 모두들 어쩌면 좋은가.


  그래도 좋다. 이미 떠나 버렸지만 아직 기억에 남은 선연한 그 영상이 있으니 좋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한 순간의 삶을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천상병, 「귀천」)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여기에 <「광복절 노래」노랫말을 다시 적는다.

 

1.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 하리      

이 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2.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에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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