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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진영 Jul 19. 2021

유년

가난과 행복의 상관관계

처음 우리 집이 생긴 것은 열 살 무렵이다. 청계천 철거민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만들었다는 도시에는 유난히 높은 언덕이 많았다. 학교를 빠져나와 도로를 건너고 끝이 보이지 않는 언덕을 천천히 오르면 숨이 차고 다리가 뻐근해질 때쯤 이층 양옥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짙고 푸른 대문을 열면 가파른 계단 세 개가 더 있고 시멘트를 바른 작은 마당이 앞과 옆에 펼쳐졌다. 아버지가 만든 좁고 긴 화단에는 목련과 장미, 대추나무가 나란히 섰다. 계절마다 피고 익고 비우는 섭리를 자연에게서 배우라며 심은 것들이다. 어느 식목일 술 취한 아버지 손에 들려온 개나리는 맨 구석에 자리를 잡았어도 해마다 가장 이르게 꽃망울을 터트렸다.


마루 문을 활짝 열고 끝에 걸터앉아 하늘 풍경 보는 것이 가장 좋았다. 파란 하늘 사이로 연둣빛 이파리들과 열 지어 자라는 수세미오이가 만드는 선이 고왔다. 어머니가 뒷골목에서 데려온 얼룩 강아지는 툭하면 새신을 물어뜯고 화단 흙을 마당으로 파냈지만 몸집에 비해 유난히 작은 꼬리를 흔들며 배를 보여주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능력이 있었다. 후드득 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날에는 부엌에서 석유곤로를 가져와 호박 부침개를 만들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바구니 하나씩 두고 마루에 앉아 작은 꽃을 접거나 목걸이 고리를 만드는 일을 했다. 여름이 되면 채 익지도 않은 대추를 따먹겠다며 우리 집 담에 오르는 꼬마들이 늘었고 엄마에게 들키는 날엔 '아줌마, 이 집 대추가 제일 맛있어요!'라며 너스레를 떨며 골목으로 사라졌다.


담벼락에 기대 노을을 바라보던 날과 고무 대야에 물을 받고 들어가 더위를 식힌 순간과 겨울 눈 쌓인 마당을 제일 먼저 밟아본 시간이 아직 내게 있다. 어느 날의 하늘과 바람과 풍경은 멀리 떠나와도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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