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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Apr 20. 2019

옛날의 그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매년 화창한 봄날이 오면 겨우내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가 봄이 오자마자 반갑게 올라오는 연하디 연한 봄쑥과 살오른 도다리와 무우넣고 한소쿰 끓여내는 통영의 분소식당에 도다리 쑥국을 먹으러 간다. 한마리 통째로 들어간 도다리의 감칠맛과 시원한 무우를 넣고 끓인 도다리 쑥국의 첫 맛은 3월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분소식당의 귀한 음식이다. 바닷가 시장통 한곳에 자리를 잡고 가게 구석구석 배여있는 시간의 길이는 분소식당을 더욱 통영의 맛집이 되게 한다. 그래서 거기는 3월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나만의 귀한 장소가 되었다. 대구에서 150km남짓한 그 길을 오로지 도다리 쑥국을 먹으러 가는 곳, 분소식당은 3월만 되면 봄햇살과 함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연인의 집같은 곳이다. 백석이 통영의 흡모하는 처녀 란을 만나러 가는 그 길도 그렇게 설레었을까? 아침 늦게 출발해도 11시쯤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니 내게 통영은 지척이다. 그러던 어느해 도다리쑥국으로 아침 허기를 달래고 둘러볼만한 곳을 찾던 나는 박경리 기념관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통영은 문학과 예술의 도시다. 윤이상 기념관이 있고 청마 유치환의 에머랄드 빛 사랑이 있는 도시다. 그리고 동양의 피카소 전혁림 미술관과 백석의 사랑이 구석구석 세월속에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곳이다. 도다리 쑥국으로 봄맛에 취해있던 내가 바로 집으로 돌아가기엔 어쩌면 너무 아쉬운 곳이었다. 통영에 이렇듯 많은 이야기들과 역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혀끝만 즐겁게 하고 온 봄 여행이  참 가벼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경리기념관이 위치한 곳은 산양읍이다. 통영대교가 없다면 섬이었겠지만 그 큰 섬을 그냥 섬으로 두기엔 통영이 너무 좁았나 보다. 그 통영대교를 건너 해변 옆 일주도로를 따라가면 기막힌 남해섬들의 고고한 자태가 이어진다. 그 길의 마지막쯤에 찾아가는 박경리기념관은 그 풍경의 긴여운을 정리하기에 적절한 곳이다. 산양읍의 중간정도에 위치한 박경리기념관은 기념관 건물과 묘지로 가는 오솔길이 있는 규모는 작지만 작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라 아늑하다. 토지의 작가로 익히 알려진 것과 달리 시도 많이 썻다는 사실은 기념관을 둘러 보고서야 알았다. 새로 조성하는 박경리 공원의 입구 넓직한 바위에 새겨진 옛날의 그집이라는 시는 한 번 읽어보자 마자 내 가슴을 송두리째 흔들며 콩콩거리게 했다.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사람이 살면 오래 살아야 100년이다. 굴곡진 한세기를 살아내고 보면 인생의 마지막에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아옹다옹 70~80년 정도 살아보면 가진것 다버리고 살 만큼 욕심이 없어지지 않을까?  그런데 그렇치 못하다. 늙어서 여생이 얼마나 남았을지 가늠할 수 없는 나이에도 욺켜쥐고 쉽게버리지 못하는 욕심이 쪼그라진 가슴에 그득한 사람이 많다. 한평생 내것 손해보지 않기위해 타인의 가슴에 못질을 해대고 그래서 빼앗은 남의 것을 자기것으로 만들고 그런 더러운 내것 챙기기에 급급했던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늙어서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더 많다. 평생을 그렇게 제 욕심것 살아왔기에 죽음을 앞두고도 재산에 연연하고 자식에게 유산으로 남기고자 온갖 불법한 일들을 스스럼없이 자행하는 것일까. 모든 악한 욕심의 기저는 욕망에 기인한다. 그것이 권력이든 물질적 풍요로움이든 가질 수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하는 인간적 상상물의 결과다. 좋은 삶이란 어떤것일까? 박경리의 시를 보고 느끼는 삶의 정의가 새삼 늙어서 과감하게 버려야할것들을 돌아보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일년을 기다려야 맛보는 소박한 통영의 음식 도다리 쑥국이 묘하게도 노작가의 무소유한 삶과도 중첩되니 봄여행의 깊이가 더해지는 하루가 되었다.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 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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