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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Mar 30. 2016

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

  


읽은 책들이 어떻게 하다보니 소설이 많았던 3월입니다. 오르부아르, 리틀스트레인져, 스토너, 로맹가리 전기그리고 아직 읽기가 끝나지 않은 어제의 세계. 어제의 세계는 전기인지, 역사책인지 조금은 애매한 구석이 있기는 합니다만 전기작가인 츠바이크 자신에 대한 책인만큼 자서전정도라고 생각해두면 좋을 듯합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컬하게도 읽었던 4권의 책이 묘하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세계1,2차세계대전의 전이나 후를 아니면 전체를 다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혹함과 잔인성과 비인간성의 모든 과정과 결과가 이 책들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는 탁월한 묘사와 자뭇 비장하게 느껴지는 문장으로 자기생에서 일어난 두번의 비극을 아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책입니다. 영화 감독인 웨스 앤더슨은 이 책에서 영감과 모티브를 얻어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이라는 걸출한 영화를 만들어냈다고도 합니다. 책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츠바이크는 이호텔에서 전쟁 중 얼마간 체류하기도 하였습니다.   우선 책은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두껍기도 하거니와 페이지마다 빽빽하게 글로 채워져있어 선듯 시작하기가 쉽지많은 않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만나는 익히들어 알듯한 136명의 유명한 문학가와 음악가 그리고 미술가, 그리고 저널리스트 정치가들의 이야기가 흥미를 자아냅니다. 시대를 같이했던 거장들과의 만남과 교제들은 마치 그 시대, 그 순간의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 속에서 공감하다보면 기나긴 이야기속에 무리없이  무난하게 빠져듭니다.

  어제의 세계

츠바이크가 말하는 어제의 세계는 과연 어떤 시대를 말하는 것일까 공곰히 생각해봅니다. 전쟁전의 세계일까 아니면 바로 오늘이 아닌 어제를 얘기하는 것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어제는 너무도 빨리 지나가고 마치 오늘과 내일의 덩어리들을 사는 건 아닌가하고 저자는 말합니다. 지나간 세기는 물질적으로 너무도 풍요롭고 안정되어있었고 정신적으로도 새로운 사상과 문학들이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고 또 회자되고 읽히고 자유롭게 토론되었던 시대였습니다. 어찌보면 문학과 사상의 황금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런 문학의 황금기에 츠바이크는 오스트리아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유태인이었습니다. 유태인이란 자신의 민족적 태생의 근거가 이제 앞으로 닥칠 모든 부조리함과 인간이 저지를 수있는 잔악함의 전조인 것처럼 느껴지는 시작입니다.  그가 유년기의 시절에 나치에 의한 유태인 대학살에 대해서 스쳐가는 꿈이라도 꿧을지 모릅니다만 아마도 그 폭력의 시작을 그시대 유럽의 어느누구라도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츠바이크의 유년기와 청년기는 넘쳐나는 유럽의 열정정인 문학과 끊임없이 솓아나는 샘물과 같은 예술적 분위기 속에서 잘 다듬어졌고 훌륭한 유럽인으로 자라났습니다. 그는 넘쳐나는 오페라와 희극들 그리고 수많은 책과 사상과 시와 그림들의 좋은 토양에서 이미 유럽의 영향력있는 지식인으로 자라날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어릴 적부터 글을 쓰고, 시를 짓고, 작곡을 하고 낭송하면서 자라났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수동적으로 정열이 주어지는 기분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청춘에게는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청춘의 본질 속에는 갖가지 인상을 받아들이는 것뿐만 아니라 창조를 통해 활발하게 대답하는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창작에 대한 갈망으로 유년기와 청년기에 이미 많은 시를 썻고 청년기에 들때쯤에서는 자기의 책을 출판하기까지 이르게 된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유럽의 예술적 바탕위에서 자라났으며 수많은 청년들 또한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저절로 예술을 사랑하게 되었고 창조의 대열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츠바이크는 단연 탁월했기 때문에 수많은 해변의 돌들 가운데서도 눈에 띄는 아름다운 수석처럼 두각을 나타내어 자신의 존재를 일찍부터 알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나는 이책을 읽으면서 나자신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떠올려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중학교에 다니던 1980년대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디지털과 멀티미디어의 시대가 아니었고 사람들은 쉽게 감성에 젖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걸어서나 아니면 몇 시간이나 걸리는 완행열차를 타고 여행을 다녔고, 종이책을 읽었으며  대학의 캠퍼스는 문학과 사상을 토론하고 회화와 연극을 찾아다녔습니다. 그 당시 유럽과는 달랐겠지만 많은 청년들이 문학을 사랑하고 그들의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때였습니다. 우리는 손으로 편지를 써서 떨리는 맘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기도 하였고, 친구나 생각이 같은 사람들과는 밤새도록 토론하여도 피곤하기는 커녕 오히려 기쁨에 들떠 행복했고, 거짓된 사상과 정치에 분노하여 청년적인 열정으로 수많은 시위에 가담하기도 하였습니다.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과 청춘이면 당연히 가질 수 있었던 오만으로 가득차있던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젠 그러한 것도 이미 어제의 일이 되어버린 오늘은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고 조금도 기다릴 줄 모르는 조급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캠퍼스에는 서점이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술취하고 느긋하게 이해할 줄 모르고 참을 줄 모르는 세대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청춘마저도 이렇듯 어제와 오늘이 달라져버린 지금, 디지털의 세계는 인간성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급하게 생산성을 내지않으면 일치감치 포기하고 새로운 것들을 찾아나서는 차가운 금속성의 세계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항상 옳바른 쪽으로 흘러가기 마련인가 봅니다. 인문학이 다시 살아나고 서점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여행을 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기 위하여 준비되어있습니다. 손으로 글을 쓰며 감성을 즐깁니다. 흐릿해져가는 인간성의 위기를 우리 스스로가 느끼고 찾으려 움직이는 자각과 정화의 행위가 아닐까 생각되어집니다.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패전국인 오스트리아에서 바로 그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주변강대국들은 쪼개지고 부서지고 허약한 옛 합스브르크 공화국을 전혀 두려움없이 대했고 버려두었습니다. 덕분에 오스트리아는 끝이었다고 누구나가 생각했을 그때 불가사의하게도 다시 문화가 일어났고 얼어붙은 극장에서 사람들은 입김을 불며 얼은 손으로 악기를 연주하고 연극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사람들은 남루한 차림으로 그 옛날 부르조아의 상징이던 그곳을 프롤레타리아의 공연장으로 만들어 대중화되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유럽의 힘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결코 지울 수없는 문화에 대한 자긍심은 오늘날에도 유럽이 정신문화의 강국이 될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유럽의 그것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츠바이크가 만난 사람들

일일이 세어보진 않았지만 츠바이크는 참으로 많은 문인, 화가, 음악가, 그리고 저널리스트 그리고 얼마간의 정치인들을 만났습니다. (책소개에서는 136명이라고 말합니다만) 그 중에서도 저는 제가 좋아하는 시인인 라이너마리아 릴케와 츠바이크의 만남은 흥미를 끄는 대목이었습니다. 츠바이크는 파리체류시절에 처음으로 라이너마리아 릴케를 만났다고 술회했습니다.

내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라는 귀중한 이름을 나의 파리시절의 페이지에 넣는 다면, 그 이유는 내가 그를 파리에서 가장 자주 만났으며 그가 누구보다도 나를 가장 좋게 대해 주었기 때문이며, 그의 얼굴이 그가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사랑한 이 도시를 배경으로 마치 옛날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언제나 떠올라 오기 때문이다.

그는 릴케를 고귀한 금세공인의 기술처럼 언어를 다듬어 내는 시인들 중 한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외면적인 생활의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폭넓은 대중의 공감도, 훈장도, 높은 지위도, 이득도 원하지 않는 시인 그 자체였으며 조용히 그러나 정열적인 노력으로 시구하나하나가 음악에 침투되고 색채 속에 빛나고 이미지에 불타도록 구절을 완벽하게 결합시키는 일 외에는 추구하는 일이 없었던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츠바이크의 이러한 시인 특히 릴케를 만난 이후의 시인에 대한 생각은 그가 오래전 유년기와 청년시절에 괴테에 심취해서 시를 썻기 때문에 시인에 대한 연모의 감정이 더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는 릴케와 자주 만나며 수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말했는데 아마도 전쟁발발 즈음에서 만난 장면을 읽어보면 릴케와 그의 만남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14년의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처음 몇 주일 동안에 다른 사람과 이성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점점 불가능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광신적인 애국자로 변해가는데 츠바이크를 정신적 무정부주의자로 생각하는 부류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마도 이 시절 정신적 목마름에 갈증을 느끼고 있을 터였습니다. 그는 당시 빈에서 오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떨어져 지냈지만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는 이따금 마음으로 서로 이해하는 대화를 나누었다고 말했습니다. 릴케는 내성정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릴적 어머니의 강요로 9살때까지 여자아이처럼 치마를 입고 자라서 그럴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정체성의 혼란을 격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군대에 지원해서 적응하지 못하고 조기에 그만 둔것을 보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츠바이크도 그리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릴케만큼은 아니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깊이있는 대화를 좋아했던 것을 보면 아마도 츠바이크는 이런 이성적인 대화와 만남을 즐기고 행복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릴케와의 대화에서는 마음으로 서로 이해하는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릴케와의 만남에서는 그리 수다스런 대화는 없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몇초 아니 몇분의 여유를 두고 한마디씩 건네는 느릿하지만 여유가 느껴지는 대화속에는 서로의 마음 - 전쟁으로 황폐해진 - 을 읽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친구와의 느릿한 대화. 별 말들이 오고가지 않아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안정과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친구 그런 친구를 둔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일 겁니다.

그는 릴케 이외에도 로맹롤랑, 앙드레지드, 아귀스트로댕, 막심고리키, 타고르, 프로이드, 제임스조이스 등 수많은 문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의 생각과 사상을 공고히 하였고 그들과 동시대에 살았던 것만으로도 그 누구보다도 더 큰 자긍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만남은 그의 인생의 과정이었고 또한 목표에 도달하게 하는 원동력이자 행복이었던 것입니다. 아무래도 츠바이크 자신도 그 세대를 대변하는 문인이라 그렇긴 하겟지만 이렇게 많은 세계적인 문인, 학자,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 사람들을 보석처럼여기고 존중하고 존경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황석영, 이외수, 정명훈, 함석헌, 주진우, 김어준, 이병주, 이창준 이러한 분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우정을 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행복한 상상을 해봅니다.


츠바이크와 히틀러
나는 본의 아니게 가장 무서우리만치 이성이 패배하고 광포한 야만성이 승리하는 광경을 묵도한 증인이 되었다. 여태껏 그 어떤 세대도 우리 세대처럼 그토록 높은 정신적 절정에서 하루아침에 야만의 세계로 몰락한 세대는 없었다. 전쟁은 세 번에 걸쳐 나의 집과 생활을 뒤엎어 버려 모든 지난날로부터 나를 떼어 놓고있는, 그 거센 힘으로 나를 허공 속에 내동댕이쳤다.


자유주의자이며 평화주의자 그리고 하나된 유럽을 지향하며 살았던 츠바이크에게 히틀러는 그 광포한 야만성으로 인해 자살에 이를 수 밖에 없게했던 살인자와도 같습니다. 잘스브르그에 살면서 뛰엄뛰엄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히틀러에 대한 소식들이 그 당시에는 츠바이크 자신에게도 치명적인 이름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말합니다. 피라든지 종족 그리고 혈통에 관한 바보스러운 히틀러의 이론에 의해 사람들을 서로 분리될 수 있다는 사실은 적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럽을 휩쓴 제1차세계대전 속에서도 살아남아 자신의 사명을 다했고 틀어진 유럽의 정신을 올곳이 바로세우기위하여 노고를 다했지만, 히틀러로 촉발된 야만의 세계에서는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으로 생을 마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유태인이라는 자신의 태생이 그처럼 위험한 죄목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히틀러도 역사에 한번쯤 반짝하고 떠오르다 이내 잊혀지고 말 흔한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듯 했습니다. 하지만 1933년부터 자신을 죄어오는 히틀러의 비수같은 칼날앞에서 피하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츠바이크의 이름이 독일에서 불려지거나 인쇄되어지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고 히틀러에 반대하는 많은 책들을 소각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증오심에 미쳐 날뛰는 히틀러에 의해 유럽의 정신은 힘을 잃었고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야만성과 근원적인 파괴 본능은 근절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친분을 맺었던 다정했으며 하나의 유럽으로 생각하며 친절했던 여러나라들은 이념과 평화와 인간성과 협조정신을 시대의 낡은 약점이라고 매도하면서 그에게서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때 츠바이크는 일생동안 인간적인 결합과 정신적인 결합을 위해 정열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자신이 그 어느때보다 더 깨뜨릴 수 없는 공동체를 필요로하는 이 시기에 갑작스런 고립을 느꼈으며 처음으로 고독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술회했습니다.유럽은 그렇게 광포하고 야만적인 한 인간의 폭거로 인해 철저하게 무너져 버렸던 것입니다. 츠바이크는 제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그의 아내와 함께 브라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츠바이크가 말한 어제의 세계는 분명 어둡고 암울했습니다. 그는 죽기전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단지 회상에 의지하여 어제의 세계를 집필하며 오늘날 우리에게 그 시대 유럽을 증언했습니다. 하나의 유럽을 꿈꾸던 몽상가였지만 그가 죽은 후 유럽은 하나의 유럽으로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모든 나의 친구들에게 인사를 보내는 바입니다. 원컨데 친구 여러분들은 이 길고 어두운 밤뒤에 아침노을이 마침내 떠오르는 것을 보기를 빕니다. 나는, 이 너무나 성급한 사나이는 먼저 떠나 가겠습니다 "   츠바이크는 유서의 끝을 이렇게 맺었습니다. 그가 소망하던 세계는 죽은 후 반세기만에 그 결실을 보고 있습니다. 한사람의 소망이 이렇듯 간절할 때 그 시기가 아직 결정되어있지 않지만 옳은 생각은 항상 옳은 쪽으로 움직인다는 자연의 법칙같은 것이 생각나게 합니다.


이책을 읽으면서 어떤 사람은 시대와 국가가 국민에게 얼마나 큰 위해를 갖게 할 수 있는 가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단지 두번의 전쟁을 떠올린 다면 그러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제의 세계는 전쟁에 대한 내용으로  몇장을 할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츠바이크는 그가 만난 많은 거인들을 통해서 유럽의 정신이 살아있음을 증언했고 파괴와 몰락의 전쟁으로 인해 그러한 정신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듯 합니다. 오늘날 츠바이크는 앙드레지드나 릴케보다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런 츠바이크의 책이 1990년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켯고 동양의 끝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하여야 합니다. "먼 옛날부터 문화라는 것은 나라에서 나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었던가? 나무가 도끼로 잘린다 하더라도, 그 씨앗은 살아남아 새로운 꽃, 새로운 열매가 열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우리보다 앞선 세대들이 창조한 것은 절대로 완전히 사라져 버려지는 것이아니다" 그는 잘려지고 버려지더라도 재생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었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유언처럼 항상 어두운 밤뒤에는 아침노을이 마침내 떠오르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유럽의 그것과 비교해도 좋을 만큼의 나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때론 잘려지고 버려져서 어두운 밤이 지속될 것처럼 보이지만 떠오르는 아침 노을처럼 새로운 꽃이 반드시 필것이라 믿습니다. 이 시대가 어두운 시대라고 생각한다면 작은 씨앗인 국민들이 변하여 새로운 꽃과 새로운 열매를 맫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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