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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Oct 20. 2016

강산무진

허무를 통해 만나는 인생이라는 것

삶은 고단하다. 그래서 극악의 슬픔에도 감정은 허무로 흐른다. 김훈의 강산무진은 이렇게 일관되게 허무로 인생을 말한다. 가을엔 일조량이 부족해서 자뭇 센티멘탈해진다고 하는 소리가 있다. 과학적으로 맞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날씨가 선선해지고부터 왠지모를 우울모드로 접어드는 걸보면 괜한 소리는 아닌 것같다. 강산무진은 그런 가을같은 소설집이다. 떠들석하고 부산스러운 여름을 지나 그 화려했던 번영을 시간에 맡긴채로 숙연하게 잠들 준비를하는 그 가을에 딱 어울리는 소설이다.


지난 주말에는 그런 쓸쓸한 마음탓에 하룻동안의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예천 회룡포. 수많은 보부상들이 드나들던 그곳에 용이 마을을 휘감고 돌아 나가는 형상의 하천이 있는 곳. 얼마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긴여정에 지친 장사치들이 하룻밤 머물며 여독을 풀던 삼강주막이 있다. 하지만 그곳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어딘가로 벗어나야만한다는 강박이 가을의 내게 있기 때문이다. 늘상 그래왔던 것처럼. 그리고 문득 가까운 용궁리의 순대국밥집에 가보고 싶었다. 네티즌사이에서 많이 알려진 곳이기도 하거니와 워낙에 돼지국밥을 좋아하는 터라 2시간이나 시외버스를 타고 갈 마음을 내게 되었다. 삼강주막에서 용궁리까지는 약 7km남짓한 거리다. 걷기는 조금 벅찰 것같기도 했지만 1시간 30분 정도이니 한번 걸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음을 먹고 보니 넓은 들녁의 황금빛 벼이삭들의 무리가 보인다. 내안에 갇혀 보지 못하던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마득한 지평선 끝자락에 머무는 길들은 뭉클대는 안개속에서 그 끝을 감춰두고 미완의 삶에 아주 작은 희망의 여지라도 두려는 듯 보인다.  


늦가을 아침이지만 걷는 내내 열기가 느껴졌다. 웃옷을 벗어 손에 들고 몇분을 걸어도 지나는 사람하나 없는 한적한 시골길을 걷고 또 걷는다. 문득 인생이라는 것이 이런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길위에 있는 것이 삶이다.  구불거리는 길에 때론 난생 처음이라고 할만한 즐거움도 있었더랬다. 그래서 구불거리는 길 입구에서 가슴을 조리기도하고 그것을 지난 수고로움의 댓가로 행복이라는 것도 조금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길은 한없이 곧아 그 끝마져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길위에는 아무것도 새로울 것이 없다. 그냥 무슨 일이 있을지 다 아는 것처럼 막상 그곳을 지나쳐도 시니컬해짐을 어찌할 수없다. 그것을 허무함이라고 할 수 있을지.


수년간 암투병을 하던 아내가 기어이 병상에서 숨을 거뒀다. 30kg 남짓한 육체는 말라 비틀어져 너무나 보잘 것 없어보인다. 그동안의 간병이 무위로 돌아가려는 순간이지만 화자는 절망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이미 죽음이라는 예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화장). 아내의 장례식장에서 새 제품의 광고시안을 결제해야하고 오래된 자신의 방광에 고인 오줌을 걱정해야 했다. 오히려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방광이 비워지는 느낌을 그는 어떻게 느끼고 있는 것일까? 좋아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슬픔에 잠기지도 않는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오는 그것이 지금 왔을 뿐인것이다. 


강산무진의 화자들을 모두 다 삶을 달관한 듯한 표정으로 생의 전환점에 서있다. 잘나가는 중소기업의 사장에서 택시기사로, 대기업의 임원에서 한낮 등대를 지키는 등대장으로, 그들은 풍족한 인생을 누리며 살았지만 어느 순간 너무나 반전한 삶을 살아야 하는 자신의 모습에 어쩌면 그들 어깨를 짓눌렀던 지난한 삶의 무게를 이젠 벗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 줄것이 없어져버린 어미 또는 아비의 모습으로 남은 인생을 그득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행복의 순간이란 것은 도데체 그 길이가 얼마나 되는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그래서 나를 꼭 닮은 2세를 얻고, 새집을 사고, 직장에서 승진하고, 사업이 날로 번창해서 큰 돈을 번다. 그러한 순간의 시간적 길이는 얼마나될까. 하루? 한달? 일년? 무엇이든 지나가기 나름이다. 지나가면 그 순간의 즐거운 기억은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일까. 그냥 그 기억만으로 행복한 순간의 엔돌핀이 지속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왕년의 내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의 흔들리는 삶을 그 화려함의 기억이 지탱해주지는 않는다. 매순간 더 나은 것을 찾고 욕망하며 살아가다 어느 순간 더 이상 얻는 것이 무의미해지고 손에 쥘 수 있는 것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그 순간 내 행복과 뜻하지 않은 불행도 허무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남은 인생이 불편한 이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한 집착에 기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한순간에 내 손을 떠나고 만다는 사실은 굳이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중년의 삶이란 것은 대책없이 밀려드는 삶의 고단함 앞에서도 담담하게 넘어서도록 만드는 나이이기도 한것같다. 그냥 가을이 좋아진다.


한국문학은 어느 틈엔가 김훈이 있어 풍요로워졌다. 그의 문장으로 소설이 완성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나로서는 그의 행보를 한참 관망했는데 그가 '언니의 폐경'을 써내자 아, 정말 소설가가 되어버렸구나, 아쉽고 즐거웠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서는 한치의 물러섬 없는 완고한 격렬함과 끝도 없이 물러서는 허무한 흔들림이 균형을 이루며 공존한다. 그 둘은 거울 속으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서로를 집요하게 묘사해가며 자신들의 삶을 대변할 한 문장의 말을 찾아간다. 그리하여 홀로인 것 같던 개별자들의 고독한 삶은 그의 손길을 거친 후엔 어느덧 새 의미를 부여받아 존귀하고 참다워져 있다. 그 과정을 탐독해가는 일은 결국은 무(無)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꽂혀 있는 '항로표지'를 응시하는 일이기도 해서 항상 기대되고 긴장된다.  신경숙(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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