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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Dec 23. 2016

무진기행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린 산들

뜬금없이 무진기행이라니. 나 역시 화자인 윤희중처럼  새 출발이 필요하거나 잠시동안 이라도 현실을 묻어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의 뒤로 숨고 싶었다. 그렇다고 죽음을 배제한 영원한 도피라는 건 꿈꿀 수도 없는 것이기에 불안한 지금의 위치에서 잠시만이라도 적당한 안위의 장소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무진에 가면 새로운 용기나 계획같은 것이 머릿속에서 술술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혹여 묶여있는 실타래를 조금쯤이라도 풀어볼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기대감에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무진이 실존하는 도시는 아니지만 작가는 무슨 맘으로 책제목마저도 무진기행이라며 오해를 살만하게 떡하니 제목으로 박아놓은 것일까. 그곳이 전설 속 판타지도 아니고 그저 기억 속에 존재하는 젊은 날의 자신을 보고 싶어하는 추억정도로서의 무진을 끄집어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무진기행을 둘러싸고 많은 독자 평론가들이 물질화되어가는 인간성에 대한 한숨섞인 현실 비판을 쏟아냈다. 속물로 정의한 윤희중의 내면을 따라 그의 뜻하지 않은 일탈 속에서 끝내 청년기의 정체성을 찾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했다. 하지만 그 역시 무진을 떠날 땐 무진에서 있었던 말들을 심장속에 간추려 보아도 그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낱낱이 분리되어 사라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터였다. 꿈 같은 일탈에서 만난 불장난 같은 사랑과 연민이 반전의 마술처럼 그를 속일 수있었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무진을 찾은 윤희중을 어쩔 수없이 도시에 희석되고마는 속물적 인물로 읽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어쩔수 없는 돌아감이 못내 아쉽고 또한 측은함까지도 느껴졌다. 중년의 삶이란 것이 청년기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허무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추억에 산다고 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윤희중에게서의 무진은 엉뚱한 추억의 공상들이 뒤죽박죽 머리속에서 섞이고 그 엉뚱한 생각들을 아무런 부끄럼없이 할 수 있도록 용기같은 것을 주는 곳이었다. 그래서 문득 부지간에 찾아와 우연하게 만나게되는 하인숙이라는 여인을 통해 항상 자신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었던 또 한번의 조건반사적인 인생의 전환이나 그런 청년의 기세좋은 사랑을 해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돌아오라는 아내로 부터의 전보한장이, 전날까지만 해도 이유없이 두근거리던 심장의 호흡을 진정시키게 했다. 아내의 전보가 무진에 와서 그가 한 모든 행동과 사고를 안개가 걷히는 시간처럼 점점 명료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고 고백함으로서 그는 전보와 타협하고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는 무진을 떠나며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경계석에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삶이란 것이 어느 때고 무책임하게 내려 놓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까지는 물러가지 않는 짙은 안개의 도시 무진에서 윤희중은 자칫 자신이 그 무진 속에 철저하게 뭍혀 보이지 않을 것이란 기대감이 있었는 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의 일탈이 안개가 겉히면 다시 들어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충동에 못이겨 비상식적 착오를 하게 된것이다. 뜻하지 않게 다가온 일탈은 계산적인 현실의 세계를 여지없이 무너뜨려버린다. 뜻밖의 일탈이 허무한 일상에 비타민 같은 것일 지라도 남은 삶까지 무책임하게 내려 놓을 수 있을 만큼 달콤하지는 않다. 김훈의 단편 "화장"에 보면 그러한 일탈을 꿈꾸는 화장품회사의 전무가 화자로 나온다. 같은 회사의 젊은 비서에게서 느끼는 감정이 글에 잘 녹아있다. 이런 글을 읽으면 혹자는 비난의 날카로운 말로 눈을 흘길 수도 있겠지만 남자나 여자나 무료한 일상에서 꿈꾸는 한번의 중독성 강한 상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불륜을 합리화하려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결국 나역시도 무진기행에서 적절한 답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김승옥의 문체에서 세월의 깊이를 느꼇다면 짧은 단편에서 더이상 얻을 건 없지 싶어진다. 나이가 들어가니 인생에 대한 생각도 너그러워진다. 청춘의 격정도 그리워지고 다만 이젠 그렇게 호기롭게 결정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나 또한 무진에서의 윤희중처럼 때때로 안개속에 자신을 숨기고 싶어지는 건 아닐까.



무진기행은 김승옥이 잡지 <사상계>에 1964년 발표한 단편 소설이다. 당시 단편을 모아 2004년 문학동네에서 김승옥 소설전집으로 재출간된 책이다. 한손에 들어오는 무진기행 하드커버. 하나쯤 서가에 꼿아두고 싶은 책중의 하나이다. 내친김에 소설전집을 다 구입하는 것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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