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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Jun 02. 2019

패자의 기억

트로츠키의 스레기통

몇일 미쉘라공의 "패자의 기억"이라는 책에 메달려 있었다. 두껍고 긴 책은 호흡이 따라가질 못하는데 어쩐일인지 패자의 기억은 읽어도 읽어도 머릿속에 남아 흔들렸다. 내용의 재미도 읽는 재미의 한 수단이지겠지만 패자의 기억은 스토리의 재미와 더불어, 새롭게 알게되는 유럽의 역사와 러시아혁명사에서 오는 세계사적 만족감을 더해 몇날을 계속 이 책에 꼽혀있게 했었다. 일을 해도 퇴근을 해도 이 책을 다 읽지 않으면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중압감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늦더라도 꼭 몇 페이지씩은 읽고 잠자리에 들었다. 어떨땐 술을 마시고도 책을 편적이 있으니 과히 패자의 기억이 끌어당기는 그것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누군가 그랬다. 책은 산하나를 넘는 것같은 인내가 필요하다고. 내겐 1,000페이지가 넘거나 가까운 책들이 몇권있다. 당연하게도 사두고 읽지 않은 책들이 대부분이다. 서가에 꼽혀진 그 책들을 볼 때마다 인테리어 소품처럼 보여 미안하다. 언젠가 읽을 날을 염두해두고는 있지만 쉽게 시작하지는 못할 것같다. 사실 두꺼운 책이라도 분권되어 있다면 1,000페이지도 3권정도되는 분량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읽지 못할 일도 아니지만 책이주는 중압감과 더불어 한권이라는 느낌이 강해서 몇 날을 한권만 들고 있다고 생각하면 쉽게 지루해지기도 한다. 패자의 기억은 약 750페이지 정도되는 장편의 소설이다. 그러면서도 인내보다는 읽는 재미가 탁월했던 책이었다. 역사적 사건들과 역사적 인물들과의 만남은 산 곳곳에 숨겨진 기암과 괴목들이었으며 때론 어둡고 눈보라 몰아치는 산중의 두려움같은 긴박감을 느끼게 했다.


패자의 기억은 알프레드 바르텔미르라는 아나키스트의 격동의 30년 남짓한 일생의 투쟁과 혁명의 이야기다. 시대적 배경은 1910년대 초에서 1940년까지가 중심이다. 소설속에는 트로츠키, 크로포트킨, 레닌, 스탈린과 같은 정치인들과 로맹로랑, 셀린, 고리끼, 앙드레말로와 같은 유명한 작가와의 만남, 러시아혁명 세계1,2차대전 스페인 내전등 20세기 초 유럽의 격동적인 사건들을 담고 있다. 역사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역사적 사건들을 작가의 시선에서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수많은 실존인물과 가상일지도 모를 인물들이 소설속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서 스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가 떠올랐다면 그리 무리도 아니었다.


알프레드는 자유주의적 아나키스트이며 혁명적인 투사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옳다고 생각되어지는 것 절대적 권력앞에서도 타협이나 절충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나키즘이라는 사상자체가 권력이나 국가주의에 반하는 사상이니 그것에 저항하고 설득하는 알프레드의 삶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역사는 늘 이러한 급진적 사상가들의 생각과는 반대 형태로 흘러가고 말았다. 그러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패자로 기억되어버린 아나키스트들의 삶은 결국 트로츠키가 말하는 역사의 휴지통속으로 버려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휴지통속엔 재생이 불가능한 사상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대가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급진적인 사상들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회적, 시대적 이유들로 인해 대중들에게 충분히 이해되지 못하여 결국 휴지통속에 버려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들은 시기적으로 적절한 때가 오면 다행스럽게 복원되어지기도 한다.


국가주의는 언제나 권력을 독점하려는 세력들에 의해서 대중들의 삶을 충분한 행복에 이르지 못하도록 한다. 그 권력의 욕심이 부의 불평등을 낳게 하고 부조리한 사회적 부패와 적폐를 양산하게 한다. 합리적이지 못한 설득과 잘못된 애국심에 대한 강권이 억지적 희생을 강요하고 이데올로기적 자가당착에 빠지게 하곤 한다. 유럽의 근대사가 그러했다. 군주정치와 전제정치가 막을 내린 혁명의 과도기에 유럽의 각국들은 공산주의, 아나키즘, 나치즘, 파시즘 등 수많은 주의와 주장이 난립하고 양차세계대전을 거쳐 유럽은 새로운 질서를 게 되었다. 그 치열함 속에서 알프레드는 자신의 유일한 신념인 아나키즘을 위해서 온생애를 투사했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그러한 노력에도 시대의 패자가 되어 역사의 휴지통속에 들어가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유럽의 몇몇나라들은 복지사회의 가장 바람직한 모델을 제시한다. 어쩌면 역사의 휴지통속에서 쓸만한 것들을 찾아보고 복원시킨 결과가 아닐까. 역사는 늘 현재의 거울과 같은 것이다. 교훈이며 다시금 악순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훌륭한 장치인 것이다. 패자의 기억에서 알프레드가 패자로 생각되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일지도 모른다. 알프레드는 다른 시간을 살았지만 그 시대에는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것을 한세기가 지난 지금의 대중들에게 연설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 설득이 공감이 되어지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무한한 가능을 열어놓고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변형된 아나키즘이 민주주의라는 국가형태에, 복지사회에 충분히 녹아있다고 믿는다. 우리에게도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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