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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Jul 04. 2019

글쓰기에 대한 반성

글쓰기와 책읽기는 자아를 성장하게 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다. 

매일 읽는 하루독서량이 들죽날죽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몇장의 페이지가 될지언정 규칙적으로 매일 읽는 시간을 갖는다. 그래서인지 책을 펴지 않는 날은 다음날까지도 불안하다. 책을 읽지 않는 날은 대부분 술자리의 후유증 때문이다. 술을 마신 당일은 물론 다음날에도 책은 읽기가 힘들어진다. 책을 읽지 못한 날의 허무함은 술마신 다음날의 숙취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술자리를 의도적으로 피하기 시작했다. 마시더라도 책읽는 일을 염두에 두고 지장이 없을 정도까지만 마시게 된다. 술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혁명적인 일이다. 마음에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술로 인해 인생의 많은 부분들이 피폐해졌음에도 술을 적절하게 자제할 줄 몰랐다. 하지만 책읽기에 빠지고 근 5년정도가 지난 지금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놀랍게도 평균 술자리가 현저하게 줄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책은 삶을 일깨우는 인생의 도끼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삶이 변하고 습관이 변하고 회색빛의 삶이 투명하고 명쾌하게 변한 것이다. 책읽기가 자아를 성장하게 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라고 말한다. 책읽기를 통해 사유의 시간이 많아지고 말에도 깊이가 있어졌다. 어쩌면 그 약간은 깊어진 언변이 심지어는 몸까지도 지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느껴진다. 책 몇권 읽었다고 자신을 지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은 어색하고 부끄러운 일이나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환경에서 살아가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건강해지는 것처럼 책읽기도 분명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쓰기에 대한 갈증이 생긴다. 책을 읽다가 좋은 문장이나 생각이 떠오르면 조바심에 읽던 책을 서둘러 덮고 노트를 편다. 하지만 금새 매끄럽지 못한 어색한 문장에 당황한다. 막다른 골목을 맞닥드린 막연함. 언제나 이것을 극복할 수 있을지. 확트인 들이나 숲에서 처럼 막힘이 없는 글쓰기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읽은 책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녀 쓰고 싶은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도 자신의 한계에 부닥쳐 한숨을 쉬게 된다. 


브런치를 시작한지 약 4년이 흘렀다. 80몇개의 글을 썻지만 읽는 사람이 공감하지 못하는 글들이 대부분이다. 조회수는 많치만 과연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는 분들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웠다. 김연수 작가는 팬티조차 입지 않은채 벌거숭이로 서있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쓰여진 것은 누군가에게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쓰는 것이 좋아진다고 했다. 그래서 벌거숭이가 될지언정 용기있게 그 80몇편의 글을 쓰고 올렸던 것이다. 많이 쓰면 기교라도 생길 것 같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런것도 없다. 아쉬운 일이지만 시간에 늙어버리고 퇴화되어버린 뇌가 쉽게 적응할리는 없지 않나 싶다. 


지금은 쓰는 일의 변곡점이다. 쓰는일의 터닝 포인트. 어쩌면 좀더 좋은 글을 쓰기위한 한템포의 쉼이다. 몇일전 장석주 시인의 책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를 읽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먼저 그의 책읽기 내공이 엄청남에 놀랐고 나도 모르게 그가 쓴 글의 매력에 자연스럽게 빠져듬에 놀랐다. 시인처럼 읽고 쓰고 싶은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내 속의 일부를 활활 태웠다. 그래서 조금더 향상된 글쓰기를 위해 나 자신의 글쓰기에 대하여 돌아보고 반성문을 쓰기로 했다. 글이란 글쓴 작가 스스로 용납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자신이 쓴글이지만 자신이 읽고 이해가 되어야하고 감동이나 교감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이란 나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될수도 있다. 나 자신이 깊게 감동하고 스스로 공감이 되는 글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치 못하다. 사람은 늘 타자에게  부딪혀 돌아오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을 판단하려 한다. 나는 나인데 내 글을 읽는 사람이 내 글을 조금이라도 멋지게 생각하도록 하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그러다 보면 기교만 있는 글이 되기도 하고 앞뒤 문맥이 맞지 않아지거나 억지스럽게 글을 인용해서 더 어색하게 되기도 한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여기저기 툭툭 불거져 튀어나와 몹쓸 글이 되고 말았다. 내가 쓴 글이지만 그것을 읽고 그것이 나에게 변화를 이끄는 글이어야 한다. 만족이라기 보다는 그 글에서 느껴지는 나라는 작가의 생각을 읽고 깊이 고개를 그떡일 수  있는 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글에서 내 생각을 읽지 못하였다.


책을 읽을 때는 몇시간이고 앉아 있지만 쓰기는 한시간을 집중하지 못한다. 너무 빠른 시간에 글을 쓰려고 하는 것이다. 생각과 철학이 담기지 않은 글이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사유가 활자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깊은 사유없이 손끝에서 저절로 써지는 글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좋은 글은 그만큼의 사유의 준비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뇌가 글쓰기에 최적화 된 전문작가들 역시 저절로 써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사유의 깊이가 깊을 대로 깊어진 그들에게는 조금쯤 저절로 손끝이 인식하는 뇌의 생각이 있지 않을까싶다. 마치 보지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처럼. 그러나 그들도 분명 책한권을 쓰기 위해서 수많은 시간을 준비에 할애를 한다. 그래야 좋은 글이, 독자가 깊이 공감하는, 그리고 그렇게 해야 독자가 작가의 글에 일체화하는 몰입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사소한 것에도 의문을 가져야 한다. 삶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처럼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생활에서 만날 수 있는 작은 것에도 깊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질문없이 답을 써내려 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회적인 이슈든 철학적인 것이든 문화적인 것이든 우선 질문이 있어야 한다. 글쓰기는 바로 그러한 질문에 답을 찾아 쓰는 것이 아닐까? 작가들은 대부분 집요한 궁금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궁금증에 대하여 답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다. 그 답을 자신의 글로서 표현하고 그 답을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 글에는 물음표가 없었다. 


설계도가 없는 글을 쓰고 있었다. 무엇을 쓰려고 한다기 보다는 막연하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앞서다보니 전체적인 구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무작정 펜을 드는 경우가 많았다. 마치 지붕을 먼저 올리고 기둥을 세우는 것처럼 글이 순서가 없으니 읽어보면 구성이랄 것도 없는 허술한 글이 되어버린다. 읽는 사람에 대한 고려가 되어있지 않는 뒤죽박죽한 글이 되어버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A4한장 정도의 짧은 글일 지라도 먼저 글의 기승전결을 생각하고 어떤 재료를 써서 어떤 공법으로 나와 독자들을 설득시킬것인가에 대한 설계도가 있어야 하겠다. 재료와 공법은 더 많이 더 광범위하게 책을 읽는 동안에 만들어질거라 생각한다.


편식하는 책읽기도 문제였다. 좋아하는 분야에만 국한되다 보니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것 같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다양해야 한다. 그러나 다양함을 해결해줄 책읽기의 다양성이 없다보니 편협하기도하고 맥락도 없는 글쓰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번쯤은 많은 사람들이 읽고 공유할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다. 그것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열망이다. 그것은 어느 순간 로또의 행운처럼 오지는 않을 것이다. 더 열심이 읽고, 더 자주, 더 오래, 더 많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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