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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Jul 08. 2019

낮설음

존재와 존재자 그리고 일상

매일 나서는 출근길의 풍경들은 익숙하지만 낮익지 않다. 눈여겨 보고 곰곰하게 생각할수록 낮설고 오늘 처음보는 것처럼 어리둥절하다. 무엇을 본다는 것은 온 정신을 짜내어 집중하지 않으면 기억속에 오래 남지 않는다. 늙어서도 아니다. 다만 지나쳐보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앞차뒷유리에 초보라는 단어가 보인다. "초보" 단어의 모양과 의미가 일치 되지 않는다. 이름은 불러서 실체를 낳 것인데 가끔 "달력"이라는 단어를 보면 달력이라는 이미지가 쉽게 떠오르지 않고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낮선 글자가 되어버린다. 사물을 규정하는 모든 이름들이 낮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동안 보아온 것들이 각막을 뚫고 지나지만 다다라야할 망막에 상을 맺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는 허상이 아니었을까.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한다. 죽음은 언제나 갑자기 찾아오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다리다 지쳐갈때 쯤 그러니까 너무 늦게 올 것같아 두려운 것이다. 그 두려움이 언젠가부터 스치듯 지나온 수많은 풍경과 사물들에게 진지한 의미와 또렸한 상을 남기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하루는 낮설고 두렵다.


저녁에는 쉽게 잠이 들지 않는다. 어쩌다 잠이 들어도 두시, 세시, 네시  나는 여러번 잠에서 깨어나고 방금 육체를 이탈한 내 영혼은 누어있는 육체를 물끄러미 내려다 본다. 누어있는 육체가 나인지, 바라보고 있는 영혼이 진정한 나인지는 알 수가 없다. 둘은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 낮설게 쳐다보고 있는 듯하다. 괴로운 것은 아니다. 다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낮설음이 힘들다. 그러다 영혼이 물러간 허공을 바라보며 멍하니 벽에 기댄채로 한참을 앉아있다. 이 비몽의 시간은 한참을 그렇게 흘러간다. 그렇게 잠을 설치고도 6시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한밤에 일어난 비몽의 시간보다 의식은 명료하지 않다. 억지스럽게 깨우는 아침의 스트레스가 극도의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것이다. 새로운 하루에 대한 기대감이 없기 때문일까. 지난밤 내가 내려다본 육체를 끌고 또다른 세상으로 나서는 새로운 시간은 힘겹다. 어쩌면 수많은 일상들에 지친 육체가 애잔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깨워지지 않는 육체를 좀더 쉬게 하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일. 아무것도 없는 무실체의 세계로 나선다.


위에서 말했듯이 나는 매일 낮익은 세계에서 낮설음의 세계로 그렇게 한발을 내딛는다. 처음 보는 것처럼 처음 만나는 것처럼 그것들은 아주 작은 형질의 기본 기억들만을 가지고 내앞에 나타난다. 그러면 나는 그 작은 형체와 질료를 가지고 완성된 모양을 유추한다. 그리고 이름을 기억해내고 의미를 부여한다. 이전의 모든 것들은 그렇게 내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종교와도 같은 작업을 하고 이전과 다르게 나는 경이롭게 세상을 바라본다. 어제의 세계는 그렇게 깨져버리고 처음 마주대하는 오늘은 새로운 세계다. 어제는 처참하리 만큼 미워했던 것들이, 또는 더러운 것들이, 더러는 의미도 없는 것들이 그렇게 낮설음의 단계를 지나 다시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매일 새롭게 열리는 세상을 향해 경이를 경험한다. 죽음이 한계이듯이 한계가 아닌 듯이. 그리고는 밤이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두세번씩 깬다. 나는 나를 보는 영혼과 그렇게 싫치않은 조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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