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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Apr 27. 2016

이것이 인간인가

아우슈비츠의 기록 

일요일 지인의 결혼식이 있어 아침일찍 부산행 버스에 올랐습니다. 차에서 읽으려고 준비한 책은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였습니다. 아우슈비츠의 그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죽음에 대한 증언이라는건 알고있었지만, 읽는 내내 아무래도 결혼식에 참석해야 하는 사람이 읽어도 될만한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들었습니다. 흔들리는 버스안의 나는 얼마가지 않아 심박수가 올라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행이라면 여행인데, 여유로워야할 생각의 공간은 넘기는 장마다 가슴을 공격하는 알 수 없는 폭력에 하얗게 비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드레날린이 과다하게 분출되어 혈관을 타고 흘러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장을 압박하고, 눈은 제데로 뜰 수 없을 만큼 아려와 1시간쯤 지나서는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둡고 음침한 그 절망의 나락들은 얇은 눈거플 위로 마치 영화처럼 상연되었고, 질퍽한 수용소의 검고 더러운 진흑을 밟고 행진하는 소리는 여전히 귓가에 남아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 움찔거리게 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최초의 구타를 당했다. 너무나 생소하고 망연자실한 일어어서, 몸도 마음도 아무런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단지 무척 심오한 경이로움만을 느꼈을 뿐이다. 어떻게 분노하지 않고도 사람을 때릴 수 있을까?


한오라기 남김없이 머리를 깍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함께 발가벗겨지고, 소독한다는 명분으로 횟가루를 뒤집어쓰고, 이유없이 구타당하고 신발도 없이 진흑창을 밟고.......................


오늘 하루 아무리 아우슈비츠의 잔혹함을 떠올리려 애써도 그 아픔까지 온전히 떠올리지는 못하겠습니다. 

하루종일 이 책을 생각하고 생각하여도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것은 도무지 무었때문인지...

썻던 글들을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지우고 ... 그리고 또 다시 쓰고...

스쳐가는 많은 사건들과 나 자신에게 일어났던 그 모든 것들을 오버랩 시켜도 그냥 멍하다는 생각밖에 들지않는 것은 그 충격의 강도가 영혼과 이성을 강탈하고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려는 것에 이미 과부하가 걸린 탓입니다. 쓰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결론입니다. 이 책의 비참함과 그 비참함의 증언을 짧은 어휘력과 누더기 같은 감상으로는 도저히 표현해 낼 수가 없습니다. 


낯선 외국어가 모든 사람들의 정신의 밑바닥으로 돌덩이처럼 떨어진다. '기상' 따뜻한 담요가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경계, 잠이라는 튼튼하지 못한 갑옷, 고통스럽기도 한 밤로의 탈출, 이 모든 것이 산산조각난다. 우리는 다시 무자비하게 잠에서 깨어나 벌거벗고 연약한 상태에서 잔인하게 모욕에 노출된다.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하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완전한 행복의 상태를 누릴 수 없어서라기보다 불행의 상태가 지니는 복잡한 성질을 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없이, 차례대로 늘어선 그 불행의 이유들이 단 하나의 이름을, 가장 큰 이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유가 힘을 잃어버릴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비탄에 잠길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들이 줄을 서 있다.


우리의 배고픔이 한 끼를 굶은 사람의 그것과 같지 않듯이, 우리의 추위에도 특별한 이름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허기'라는 말을 쓴다. '피로' '공포' '고통'이라는 말도 쓴다. '겨울'이라는 말도. 하지만 이것은 전혀 다른 것들이다. 자기 집에서 기쁨을 즐기고 고통을 아파하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만들어내고 사용하는 자유로운 단어들이다. 만일 수용소들이 좀더 오래 존속했다면 새로운 황량한 언어들이 탄생했을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으려 할때는 아마도 더이상 삶이 인간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확신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식인들. 그리고 예술인들의 죽음 그리고 더이상 존엄이 자신을 지켜주지 못할때에 이르렀을 때 인간은 삶을 욺켜지지 않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할때 예를들면 레비가 죽을 두배로 배급받을때 또한 수용소에 마련된 진료소에서 한달을 입원하게 되었을때 어쩌다 하루의 일을 쉬게 되었을때 구멍난 신발안에 채워넣을 천조각을 손에 넣게 되었을때 이런 보잘 것없는 상황이 절망의 문턱을 넘지않도록 해주고 계속 살아가게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을 건드리거나 달리는 기차에 뛰어드는 일을 조금은 더 뒤로 미루어 놓을 수있는 것이라고 부끄러운 고백을 합니다. 


프리모레비에게 있어서 존엄하게 죽을 생각의 자유마저 없는 수용소의 생활이, 인간다운 삶의 마지막 비참함이었던 것입니다. 자살은 사상과 생각의 자유가 허락되어야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증언한뒤 자살로 삶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살아있음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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