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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Apr 19. 2020

생존을 위협하는 변수

2020년4월15일 또는 4월16일쯤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들을 깨닫게 해주는 고통의 시간. 보이지만 볼 수 없는 것들은 지쳐 가라앉아 시간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게 한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막막함은 실어증 걸린 환자처럼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의 나를 응시하게 한다. 연일 도로에는 경광등 돌리는 급한 구급차의 행열이 이어지고 그 숨 막히는 억제가 어떻게든 와버린 봄조차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문득 달려온 봄을 반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꽃향기 대신 소독된 손끝에서 코를 찌르는 에탄올 냄새만 슬프다. 그렇다고 모든 사악한 것들이 녹아 없어지기야 하였을까만 나는 연일 에탄올 묻은 손을 문질러대고 손가락의 지문이 녹아 없어질 만큼 열심히도 비벼대었다. 지나간 시간은 다시 내 앞에 놓이지 않는다. 엉망으로 짓이겨졌든 잘 이겨 내었든 그 막막한 시간들은 그렇게 또한 지나가 버린 것들이 되어서 그 감언의 말들에 고개를 그떡이게 할 것이다. 그리곤 기억의 저편에서 재구성되는 망각의 골고다를 만들어간다.


움직이던 시간이 갑자기 멈춰 서고 마르는 입안에 이물 같은 침묵이 고이기 시작했다. 나는 도대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지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되묻는 지금이다. 연일 수천 명의 죽음이 영혼의 존엄을 무시당한 채 아무렇게나 버려지고 묻히고 있다.  21세기 갑작스레 찾아온 페스트의 시대에 살고 죽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인간은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 자신들이 살아온 세계를 불과 100년 만에 절망에 이르게 했다. 그래도 어떤 이들은 말하겠지.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았다고. 


다행스럽게도 전조는 늘 있어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전조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왔고, 공기 같던 자유를 고통과 함께 스스로 억누르며 살아야 할 지독히 어두운 감옥이 되고 말았다. 영혼을 관통하는 시간의 화살은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무수히 많고 작은 생명체에게 지배당한 채 그 오랜 시간, 전에도 있었던 그 불행을 다시금 격고 있는 것이다. 반복해서 또 얼마나 많은 반복이 안일하고 이기적이고 욕심 많은 인간이라는 종을 굴복시킬 것인지. 그러면서도 늘 지배하고 있다고 믿는 어리석고 이기적인 종은 한 번은 폐가 썩고 또 한 번은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갈 것이다.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지배하는 존재인 줄 알지만 생존을 위해 다른 종과 끝없는 전쟁을 한다. 이겨 살아남기 위해 이 땅에 더 오래도록 존재하기 위해 더 많은 종들을 죽여가며 스스로를 죽이고 있다. 모든 변수들을 가정하지만 몇% 되지 않는 어리석은 희망에 기대고 살아간다. 우연히 만들어지는 지상의 변수들은 인간이 태어난 그 엄청난 변수만큼이나 해악이지 않았을까. 뼈만 남아 뼈를 긁고 후회하는 아픔의 굵은 눈물이 황량한 먼지 바닥에 큰 웅덩이처럼 떨어진다. 


그러함에도 시간은 온갖 더러운 것들을 정화하며 흐른다. 마치 강처럼, 마치 폭풍우처럼. 두렵고 무서운 감정들은 내 안의 세계에서 휘둘려도 결국 나라는 존재는 먼지만큼이나 미미하다. 그 먼지들이 씻기어 나가면 조금쯤 행성이 평온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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