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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Aug 11. 2021

전원교향곡

비가 오면 전원교향곡을 듣곤 합니다. 화창한 날이 어울리지만 비 오는 날의 전원도 좋더군요. 차창과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전원의 아름다운 멜로디와는 역설적이지만 묘하게도 잘 맞아떨어집니다. 빗방울이 차창을 후드득 때리며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오케스트라의 한 부분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혹여 운이 좋아 뇌우라도 떨어지는 날에는 잠깐이지만 우르릉 거리는 4악장과도 잘 어울리구요. 오늘 아침엔 먼산 위에 구름들이 잠깐 게인 하늘 밑으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하얗고 깨끗하게 보였습니다. 그렇게 자연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전원교향곡에 스며있었고 음악은 자연 속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거의 매일 자연과 음악이 빚어내는 멋진 풍경과 소리들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마음마저 축축하고 눅눅한 습기의 계절이지만 출퇴근길만큼은 비도 아름다운 음악의 한 부분이 된다는 사실이 즐겁습니다. 그러나 출근해서 일하다 보면 그 아름다운 선율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 잊히고 그냥 하루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일하는 시간은 왠지 지루하고 답답하고, 이내 챗바퀴처럼 돌아가는 하루의 시간이 블랙홀에 빠진 것처럼 무한 반복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사람은 때로 자유롭고 싶어서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몸과 영혼에 붙은 온갖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벗어던져 버리고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집니다. 음악은 지금 이곳을 떠나서 어딘가 낯선 공간에 머물도록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또한 음악을 들으면 빈 공간에 마치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기도 합니다. 그저 음악과 나만 있는 공간에서 음악이 내 영혼에게 하는 말을 들으면 작곡가들 그들의 삶에 공감도 되고 그들 역시 많이도 외로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베토벤은 어느 날 자신의 배앓이가 점차 악화되고 청력이 조금씩 상실되는 것을 느끼며 유서(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씁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남아있는 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남깁니다. 자신의 비참한 현실에 비추어 아주 절망적이며 비참한 심정으로 말이죠. 하지만 베토벤은 마음이 변했는지 유서를 잘 보이도록 책상 위에 놓지않고 서랍 속에 감추어 버립니다. 봉투엔 죽은 뒤에 개봉하라는 글을 썼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바람이 맞았는지 이 유서는 죽은 뒤에 발견됩니다. 베토벤이 그때 자신의 삶을 마감했었더라면 우리는 전원을 듣지 못했을 겁니다. 그의 상실감이 도리어 창작을 향한 역량에 도화선이 되었고 점화되었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청력상실이 베토벤을 자유하게 했다고. 그가 느낀 삶의 상실이 오히려 그를 자유롭게 했다는 것이 과연 진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후 그가 쏟아낸 엄청난 창작물들은 그 말이 사실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 죽음을 생각하는 경우가 과연 몇 번이나 될까요? 죽음은 두려움이지만 고통 가득한 삶에 마지막 탈출구가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어둡고 긴 터널 끝에 한 줌의 빛처럼 보이는 끝. 그 끝을 잠시 생각해본 사람들은 그 끝이 도리어 자유함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절망을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의 회귀, 이전과 이후의 확연히 다른 삶. 베토벤은 유서를 쓴 이후 오히려 교향곡 2번과 같이 밝고 화사한 곡들을 썼습니다. 또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아름다운 산책로에서 본 자연의 모습을 전원교향곡에 고스란히 담기도 했으니 삶의 끝에서 새롭게 태어난 것 같은 감정의 열화를 경험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언제나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일상 가운데 함께 있습니다. 몸과 영혼이 만신창이처럼 너덜 해지고 자꾸만 땅 밑으로 침잠해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여기 이곳은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그곳이 아니고 모든 것이 촛농처럼 녹아 늪 같아 보입니다. 어둡고 힘듭니다. 밝은 곳은 어딜 봐도 없고 그저 다리를 붙들고 있는 밀도 높은 늪이 아래로 아래로 자꾸만 잡아당기다가 마침내 더 들어가지 못하고 어중간한 자세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순간인 것만 같습니다. 아직은 많은  날들이 내 앞에 있지만 그 남은 많은 날들이 오히려 더 짐스러운 지금은, 머리를 숙이고 우울할 수밖에 없는 날 들이 되곤 합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 깊은 곳에 갇혀있는, 더는 접근할 수 없는 어떤 고통을 갖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생겨난 생채기를 매일 혀로 햩아보지만 쉽게 낫지는 않습니다. 삶의 굴곡은 살고 있는 도처에서 의도치 않게 생겨나고 넘어가고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고통을 벗어날 만한 도피처 아니 안식처 하나는 마련해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것이 음악이든, 캠핑이든, 책 읽기 이든 그 낯선 곳이 편안하고 눈에 익은 마음속 편함이 될 때까지 집요하도록 찾아보는 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해봅니다. 


베토벤의 전원을 들으면서 가보지 못한 넓게 펼쳐진 목초지와 조용하고 다정한 집들과 군데군데 서있는 나무와 숲과 흐르는 물을 상상하는 일, 어느 날 그렇게 전원교향곡은 고통을 벗어나는 공간의 통로가 되어주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음악이 정신의 혼란함과 외부에서 밀어닥치는 고뇌와 내속에서 치고 올라오는 고통을 정화시켜줄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일상은 늘 바쁘고 그 안에서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고통과 고뇌에 마음을 정박시켜 둘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평안을 찾아 나서는 여정 자체가 즐거움이 되고 있습니다. 각자 영혼이 쉴 수 있는 내면의 공간을 만들어 보는 일,  없다면 한번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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