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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Jul 04. 2021

스비야토슬라프 리흐테르

자유로운 이방인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느낌은 분명 행복하거나 즐거운 기분을 줍니다. 스비야토슬라프 리흐테르 다소 긴 이름과 발음도 어려운 이 피아니스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날은 햇빛도 창연한 3월의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둥든 둥든 하는 첫음이 고조되면서 시작하는 피아노의 여운이 끝나고 곧이어 시작되는 관현악의 웅장한 서사와도 같은 음악은 귀를 통해 눈으로 보였습니다. 자동차의 앞유리창을 통해 높은 산과 넓은 들, 흐르는 강들이 한꺼번에 들어와 내 몸을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었습니다. 머릿속은 한결 맑아졌고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음악만이 흐르는 것 같은 경이로움을 체험했던 하루였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상당히 유명한 곡이었어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부문에도 늘 상위를 차지하는 곡이라더군요. 웅장함과 서정성 그리고 서사적이기도 한 낭만성. 어쩌면 마지막 낭만주의 음악이라는 이곡을 통해 연주자도 처음 알게 되었었구요. 그렇게 저의 클래식과의 첫 만남은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곡을 듣고도 몇 년이 지나서야 적극적으로 클래식을 듣게 되었지만 그 첫인상은 언제나 뇌리 깊숙한 곳에서 강력하게 기억되는 곡이 되었습니다.


반쯤은 벗겨진 대머리, 그의 눈에는 알 수 없는 우수 같은 것이 흐릅니다. 꽉 다문 입에선 최고의 연주자라는 자의식 같은 것도 느껴졌습니다. 리흐테르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이 담긴 시디 재킷입니다. 이 시디 역시 연주자가 누군지 몰랐지만 단순히 곡이 좋아 구매하게 된 것이지요.


브뤼노 몽생종의 리흐테르 [회고담과 음악 수첩]이란 책을 선 듯 구매하게 된 것도 아마 이 피아노 협주곡에 기인했다는 생각이 큽니다. 다양한 연주를 들어보진 못했지만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이 담긴 이 시디 한 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브뤼노 몽생종이라는 영화제작자가 리흐테르와 만나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나눈 대화를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들어가는 글에 저자와 리흐테르의 만남이 자세하게 나옵니다. 마지막 만남을 앞두고 그가 연주한 슈베르트의 마지막 소나타 21번은 죽음을 앞두고 연주한 것이라 그런지 그 느낌이 아주 슬프게 느껴졌어요. 세상을 향해 안녕이라고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그의 인생과 회한이 고스란히 담긴 연주라는 느낌이었습니다.


피아니스트는 고독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관객들에게 새로운 것을 선사하고 싶었고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그의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찾아갔습니다. 여행 중 한적한 시골마을에서도 그는 자신의 연주를 들어줄 청중들만 있다면 그 수의 많고 적음을 고려치 않고 연주했다고 합니다. 그는 55년의 연주활동 기간 동안 1천여의 장소에서 3천6백 회의 연주회를 가졌고 약 2만 7천 곡 이상을 연주했습니다.


그는 하루 세 시간씩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암보 즉 악보를 외워서 연주한 것으로도 유명한 피아니스트라 연습시간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언제든 완벽을 기하기 위해 준비하는 그의 근면성이 청중에게 매번 다른 특별함으로 감동시키는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연습을 많이 하다 보면 '물이 끓기 시작하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고, 바로 그 순간이 중요하다' 그는 항상 끓어 오른 다음에야 연주에 임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청중에게 뜻밖의 기쁨을 선사할 수 있었고 같은 곡일 지라도 매번 다른 느낌을 주는 연주가 되었지 않았나 싶어요.


"무릇 연주가란 하나의 실행자다. 작곡가의 의지를 정확하게 실행하는 사람인 것이다. 연주자는 작품 속에 이미 있는 것만 들려줄 뿐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다. 재능이 있는 연주가는 작품의 참모습을 언듯 언 듯 보게 해 준다. 그 자체로 천재적인 작품의 진실이 그를 통해 반영되는 것이다. 연주자는 음악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 속에 녹아들어 가야 한다. 나는 나 자신의 연주 방식에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로 변화가 있었는데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만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단지 어느 때부턴가 내 연주가 한결 자유로워진 점은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생활의 속박과 일체의 군더더기, 본질에서 마음을 돌리게 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말이다. 나는 스스로를 안에 가둠으로써 자유를 얻었다. "


책을 읽으면서 리흐테르는 오로지 음악을 위해서만 살았던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론 정치적이기도 하고 때론 세상과 타협하면서 예술가로서의 양심을 가볍게 여겼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또는 물욕을 위해서 연주한 사람들... 그들은 점차 근시가 되어 현실 너머를 볼 줄 아는 인간다운 시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아마도 예술이란 인간다운 시선을 잃지 않게 해주는 정신의 보루 일지도 모릅니다. 리흐테르는 그런 세상을 향해 이방인의 길을 걸었고 자기만의 세계를 고수하며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피아니스트 중 하나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그의 삶을 돌아보면 그리 과하지 않은 평가라 생각합니다.


일요일 하루를 대부분 그의 연주만 들으면서 보냈습니다. 짧기도 하고 또는 길게도 느껴지는 하루였습니다.

짧게 느껴진 시간도 길게 느껴진 시간도 내겐 큰 행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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