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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Sep 04. 2021

MARTHA ARGERICH

삶과 사랑 그리고 피아노

미숙한 삶을 바로잡으려니 많은 것들이 필요하고 이미 오랜 시간 내속에 자리 잡은 부조리한 것들을 걷어 내고  싶어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보기도 한다. 나이는 먹어도 여전히 철없는 생각들이 다른 이에게 결례가 되기도 하니 이제서야 내게 예술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갈 곳 정하지 않은 여행도 다니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인생 자체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여행의 경유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 잠깐 머문 곳이 분명 어제와는 다른 곳이 되어야 하지만 그렇지도 못하다. 거기가 거기이고 여기가 여기인 것처럼 불쑥 들어오곤 하는 의미 없는 데자뷔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위대하고 민감한 정신의 소유자들에게 권태란 영혼의 불쾌한 무풍이다. 그러나 행복한 항해와 유쾌한 바람에 선행하는 이 무풍을 잘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 니체의 말이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아내는 것이 해야 할 일인데 참혹한 권태를 만들어 내는 불지 않는 바람에 우습게도 인생은 자주 흔들린다. 생각을 잠식하고 무의미함을 눈치챈 그런 경박함이 경쾌한 바람 불지 모르는 내일을 희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전기나 평전을 통해 예술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날이 많아졌다.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은 내면에서 휘몰아치는 자유의지를 제 욕심 것 다 채우고 살았을까? 때론 괴팍하기도 하고 때론 고지식한 규칙을 만들어 그 틀 안에 가두기도 한다. 타자의 이익이나 기다림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자신의 기분이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고고하고 민감한 예술가들의 삶은 그들이 내리는 정신적 풍요의 은혜를 기다리는 애타는 팬심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 조차 용서가 되는 것도 그들이 메마르고 척박하기 까지 한 인간의 공허함을 채워주기 때문 일 지도 모른다.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연주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녀의 이름이 주는 밑도 끝도 없는 멋진 뉘앙스라 한다면 좀 우스운 일인지도 모른다. 마르타 아르헤리치 얼마나 멋진 이름인가? 마치 피아노를 부숴버릴 것 같은 강철 타건이라느니 손끝이 만들어내는 기적 같은 멜로디가 아니라 그저 이름이었다. 그녀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피아니스트다. 천재성을 드러낸 피아니스트가 그렇듯 한번 듣고 배워본 적도 없는 곡을 보란 듯이 연주하고 그 숨길 수 없는 재능을 부모에게 간파당한다. 어릴 적부터 자유한 삶을 포기한 채 부모의 손에 이끌려 세계를 전전했다. 언제 어디서든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주를 강요당하고 그 재능이 만개할 때까지의 방황과 인내와 세상을 향한 반항이 마르타에게도 있었으니 그녀에게 특별할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여성 피아니스트다. 어느 누구도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그 다섯 손가락에 든다는 것에 의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현재 그녀의 나이는 1941년 6월생이니 80을 꽉 채우고도 몇 달이 남는다. 나이는 80이지만 그녀의 연주는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연주되고 있고 협연과 독주 실내악 어디서든 건재하다고 한다. 백발에 풍성한 머리칼을 흩날리며 등장하는 그녀의 무대는 당연하게도 묵직함과 범접할 수 없는 경외심까지 들게 한다.


이 책은 그녀 80년 삶의 평전이다. 그녀가 살아온 인생과 방황, 사랑. 그리고 그녀가 만났던 수많은 음악가와 세계적인 연주자들과의 만남이 흥미로운 필체로 녹아있다. 그녀의 음악은 타자를 향한 공감능력과 자유로운 삶에 있다. 인간 영혼의 깊숙한 곳에서 요동치는 절망과 희망을 연주한다. 그래서 그녀의 연주는 듣는 이에게 영혼을 어루만지는 깊이 있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녀는 결코 격식에 얽매인 가식찬 클래식 세계의 연주자가 아니다. 그녀는 기꺼이 많은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었고 좌절하는 예술가들의 멘토가 되어주었다. 그녀는 제네바의 한 고아원 건물을 임대해 많은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드나들어 연주하고 그들이 그곳에서 만나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게 하고 서로의 삶을 공유하게 했다. 그것으로 인해 그들은 좌절에서 벗어나기도 했고 새로운 길을 찾는 계기가 되게 하기도 했다.


삶이란 것이 언제나 그렇듯 마음먹은 데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돌부리에 차여 엉뚱한 곳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돌부리에 어느 날 정신을 차리게 되고 지금 서있는 곳이 옳은 길인지 아닌지 돌아보는 깨달음의 계기가 된다면 그 돌부리가 참 고마운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녀가 연주하는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들어보면 사람의 감정을 어루만져주는 정서적 매력이 듬뿍 담겨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치 돌부리에 차인 아픈 발을 만져주는 것처럼 부드럽게 흐르는 피아노 소리는 화끈거리는 아픔을 치유하고 빠져들게 한다. 한 연주가의 연주가 이렇듯 사람의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하는 데는 그 연주자의 삶과 정신이 마음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음악에는 시간을 멈추게 하는 힘이 있다. 음악은 순간의 덧없음을 날카롭게 의식하게 함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를 희석시키는 또 다른 차원을 제공한다. 피아니스트는 영원한 아이로 남았기에 언제나 자유로이 발견하고 언제나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아이였기에 지나치게 감상적인 노스탤지어나 치기 어린 허영, 발목을 잡는 소유욕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자신의 위상을 다지고 후세에 남길 이름을 준비하는 어느 예술가와 달리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죽는 날까지 자신의 유일한 신조에 충실할 것이다. "살아가고, 살게 하라" 이 신조는 도그마도 아니고 행동 노선도 아니다. 모든 것이 메이고 얽힌 이 세상에서 예술가의 자유는 숙명인 것을. 마르타는 달리 행동하려야 할 수가 없는 사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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