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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Sep 05. 2021

브람스 평전

무엇이든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깊이 빠져듭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좋아하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아무런 대가 없이도 모든 걸 쏟아붓게 됩니다. 마치 이전의 나는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주고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은 고스란히 발가벗겨질 때까지 주기만 합니다.


음악, 그 아름다운 감정의 세계를 알고부터는 하루의 모든 시간이 한쪽 방향으로만 치우쳐 흐르는 것 같습니다. 일하는 중에도 아침에 들었던 선율이 눈앞에 음표의 강물로 흐르고 귓전에 환청처럼 들리곤 합니다.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기도 하고 듣고 싶어 조바심이 나게 합니다.  이런 사랑이 없다 싶습니다. 클래식에 관한 책들은 그런 사랑을 키워가는 재료들이 되어 이전에 없던 눈물기 많은 감정의 세포들을 좀 더 풍성하게 다듬어 줍니다.


등걸이 갈라지고 물기 하나 없이 바싹 말라가는 내 인생은 가을입니다. 어느새 늙어버린 이마의 골 주름과 온몸이 건조해서 긁어 피가 나는 살갗이 마치 햇빛 강하게 쏘아대는 메마른 갯벌의 갈라짐 같아 우울하기도 합니다. 이런 제게 브람스의 음악은 그야말로 홍수처럼 우수의 감정을 쏟아부어주었습니다. 우울해지면 저 깊은 우울의 깊은 바닥까지 내려가 보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브람스의 음악은 그런 우울을 즐기게 해주는 한 요소가 됩니다. 브람스의 음악이 가을과 잘 어울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음악이 갈라진 영혼에 말을 걸어주길 바랬습니다.


그가 태어난 북독일의 함부르크는 여름이 서늘하고 그 짧은 여름이 지나가면 북유럽 특유의 스산한 가을이 온다고 합니다. 음산하고 안개가 잦은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브람스의 음악은 듣는 이에게 자욱한 안갯속에 서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그래서 브람스의 음악은 밝고 화사하지 않습니다. 생각에 잠기게 하기 좋은 음악입니다. 19세기 낭만주의의 최고 정점에서 오히려 자신이 추구하는 길을 오롯이 갔던 브람스입니다. 기교와 테크닉을 요구하고 화사한 선율의 대중적인 요구를 따르지 않고 브람스는 바흐나 베토벤 같은 대가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곡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들어봅니다. 웅장한 서주와 달리 뒤를 잇는 피아노 소리를 들어보면 고뇌를 재촉하는 모티브가 됩니다. 가슴을 흔드는 애틋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곡입니다.


"외관은 어두워 보이지만 좋은 친구이고 도덕가이며 정직하다. 위대한 시인은 아니다. 그래서 나와 같다. 친애하는 여러분, 당신들과도 같다" 첼리스트 아너 빌스마가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를 녹음하면서 남긴 말입니다.

젊은 날의 브람스는 상당한 미남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브람스의 모습은 말년의 사진이 대부분입니다. 고뇌에 찬 무뚝뚝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낀 그의 얼굴을 보면 왠지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의 내면은 따뜻합니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태어나 어릴 적엔 선술집에서 피아노를 치며 가족의 생계를 도운 든든한 장남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에겐 삶이 어렵고 궁핍한 사람에 대한 따뜻함이 있습니다. 슈만의 죽음으로 혼자가 된 클라라와 그 가족을 끝까지 돌보았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풍월당에서 나온 이성일 저자의 브람스 평전은 800페이지가량의 두꺼운 책이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습니다. 브람스의 일생을 아주 자세하게 재미있는 필치로 그려놓았습니다. 중간중간에 보이는 중심 이야기 이외의 정보나 주변 인물들은 박스로 묶어 놓았기에 지나쳐도 되고 읽어도 흥미롭습니다. 어쩌면 브람스에 대한 이야기로는 이만한 책은 없을 듯합니다. 저자는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 음악가에 대한 평전을 읽고 충분히 소화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음악을 듣기 위해  왜 이런 책까지 읽어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작곡자의 삶이 어떠했기에 이런 음악이 창작되었는지 알게 된다면 음악은 이전과 다르게 많은 언어와 감정을 품고 듣는 이에게 다가옵니다. 마치 영혼에 말을 걸어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고 좋아하면 더 알고 싶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작곡자와 마치 곁에 있는 것처럼 교감하게 되기도 합니다. 


언젠가부터 가을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제게서의 가을은 네 개의 계절 중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들뜨고 활동적인 여름이 끝나 생각에 잠기게 하는 계절이기도 하지만 브람스의 계절이라는 말을 듣고부터는 올해의 가을은 더욱 기다려지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낙엽이 흩날리는 도로 위에서 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교향곡 1번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 풍경이 차 안으로 빨려 들어올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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