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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Oct 18. 2021

슈만 평전

유령 변주곡(Geistervariation)

대중적이어서 달콤하거나 귀를 착 감아도는 음악보다는 약간은 어렵게 들리는 음악에 대한 선망과 호기심이 많았다. 음악을 즐기거나 소비하기보다는 조금쯤 공부해야 할 만한 영역으로 혹은 일종의 겉멋으로 접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깊이가 없다 보니 클래식 관련 책을 사보기도 한다. 하지만 읽다 보면 겉멋만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책 속에 한 사람의 인생이 한 사람의 우주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고 나면 삶이 무거워질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살아가는 것이 나이를 먹어 갈수록 만만치가 않다. 가을이어서도 그렇겠지만 어느 날은 끝 간 데 없이 우울해지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상념에 빠져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게 되기도 한다. 그런 내게 슈만의 음악이 주는 공감은 어쩌다 발견한 아늑한 인생의 숲길 같았다. 수필처럼 가볍지만 그리 가볍지만은 않으며 무거운 인생의 질문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의 상처와 흔적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기에 그토록 심상했는지 알 수 없으나 슈만의 내면이 고스란히 그의 작품과 함께 왠지 모를 가슴 울림을 주었다.


그가 숨겨둔 은밀한 투명무늬들을 찾기 위해 꽤나 긴 시간을 두고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은밀하게 숨겨둔 문장을 찾기 위해서 슈만에게 묻고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고뇌가 한순간 내게 와닿는 듯했다.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죽을 듯한 고통의 순간이 있었다. 이 순간이 지나면 그 고통은 없어지는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고통이 지나가면 또 다른 고통이 찾아와 영혼과 육체를 짓누르고 그 상쇄되지 않는 쳇바퀴 안에서 상심의 터널을 지나는 발걸음만 무거웠다. 주저앉기도 하고 도무지 꿈적도 할 수 없는 마비된 신경이 어떨 땐 꿈속의 가위눌림처럼 몸서리 쳐진다. 생각해보니 역시 이만큼 살았다고 해본들 더 이상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슈만의 음악을 들으면 위로보다는 깊숙한 고통의 은유를 즐기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그 고통이 내 삶에 위로가 되어준다. 그렇게 맞닿은 것이 유령 변주곡(Geistervariation)이었다. 라인강에 몸을 던지기 직전에 썼던 유서와 같은 마지막 작품. 산다는 것. 지상에 체류한다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부채와도 같았다. 도무지 갚을 수 없는 부채 앞에 서있음을 깨달은 그가 라인강의 다리 위에서 간간히 얼어붙은 라인강을 바라보고 느낀 것은 삶의 부채였다. 잡으려고 애써봐도 달아나는 저 먼 강의 흐릿한 빛처럼 아무리 노력해봐도 서있는 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공허함. 그 공허함을 상쇄하기 위해 고통과 고뇌를 지불해도 남는 것은 또 다른 고통과 고뇌일 뿐이었다. 그것을 견디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지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지불해야 할 통행세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유령 변주곡을 들어본다. 조용한 물 위에 가벼운 바람이 스치듯 울리는 피아노 소리. 한음한음이 약한 파동을 만들고 저 멀리까지 사그라들지 않고 내가 서있는 곳까지 밀려온다. 말을 하지 않아도 들리는 듯한 목소리가 있다. 46년 남짓한 그의 삶이 이 한곡에 다 들어있는 듯 오늘 힘겨운 내 가슴 한편을 뭉클거리게 어루만진다. 다리 난간에 선 그는 이제 부채 같은 삶을 유예하던지 내려놓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슈만의 음악은 수많은 고통을 지불하고 얻은 삶의 흔적이며 생채기였다. 그의 고통스러운 삶이 없이 그의 문학과도 같은 음악이 나왔을까. 그 삶의 고통이 토해낸 음악이기에 연주자에게도 듣는 이에게도 그저 가벼운 낭만의 음악은 아닌 것이다.


나는 <여인의 사랑과 생애>를 들을 때 내가 듣는 것이 슈만 자신의 소멸임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그의 다른 음악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의 곡을 연주한다는 것은 슈만의 뒤를 따라 무서운 복도를 걷는 것이다. 그 경험이 좋든 싫든 나는 결코 이를 주저하지 않았다. 슈만을 연주할 때면 그 곡의 정서적 의미에 밀착되는 기분이 들면서 온몸의 화학적 성질이 바뀐다. 음악을 통해 이 기묘하고도 아름다우며 망가진 사람을 제대로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어떤 위험이 따르더라도 알고 싶다. 이런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 jonathan biss


슈만의 곡은 연주자에게도 해석에 엄청난 부담을 주는 것 같다. 기묘한 아름다움, 온몸의 화학적 성질이 바뀔 만큼 몰두해야만 해석해 낼 수 있는 슈만의 곡들. 그 곡들을 연주할 때 설사 연주자가 망가지더라도 사랑이라고 느낄 만큼 연주자는 그 깊은 심연까지 내려와 앉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은 듣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도무지 알 수 없을 깊이만큼 내려가는 고독과 그가 끌고 내려가는 삶의 무게 그를 언급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는 그 무거움. 헤르만 헤세는 그의 음악을 이렇게 말한다.


슈만의 음악은 우리들에게는 더없이 매혹적이고, 날아오르게 하고, 한없이 사랑스럽다. 우리들은 이 매혹적인 작곡가를 위협하고 삼킨 깊은 어둠, 그 밤을 알기에, 그의 음악을 더 사랑하게 된다. (헤르만 헤세)


풍월당에서 출판한 이성일 작가의 슈만 평전은 그동안 막연하게 알고 들었던 그의 작품들을 새롭게 듣게 한 계기가 되었다. 슈만의 음악을 사랑한 작가의 애정이 두툼한 책에 고스란히 들어 독자에게 슈만을 사랑하게 하는 길잡이가 되어준다. 마치 어두운 숲길에서 만나는 별들처럼. 작가는 여전히 그의 음악을 들으면 가슴을 뛰게 한다고 했다. 그의 음악을 듣고 가슴이 뛰지 않았다면 아마 살아있지 않았다고 할 만큼 그의 청춘과 인생에 살아갈 힘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자유로운 정서로 내면의 심연에서 슈만과 조우하는 무한한 기쁨과 행복감을 느끼는 삶. 슈만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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