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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Jun 15. 2016

채식주의자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는 소통의 부재

누군가 절망적인 고통 속에서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그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 고통스러운지 아픔의 시작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이 아프면 가슴이 먼저 아프다. 가슴을 찟고 싶을 만큼 내 안에는 상상할 수 없는 몸부림이 일어난다. 그 요동치는 마음의 감정은 정신과 의사앞에서 진료를 받는다고, 프로작이라는 항우울제를 먹는다고 잠잠해지지 않는다. 항우울제는 정신에 진통제를 놓는 것처럼 잠시, 그것도 아주 잠시 고통스런 기억을 잊어버리게 할 뿐이다. 또한 화학적 생각 억제대다.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약물로 금지시켜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꿈을 꿧어" 처음 냉장고 앞에 서있었을 때 영혜는 그렇게 말했다.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 할때도 "꿈을 꿨어" 한마디 였다. 그 누구도 그 꿈에 대해선 들으려 하지 않는다. 무슨 꿈을 꿨느냐고 물어 볼만도 한데. 그냥 엉뚱한 소리라 생각하며 쓰레기통으로 바로 던져버린다. 단절이다. 고통에 대한 이해보다는 그 고통을 공감하는 것을 힘겨워한다. "나도 힘들어 도데체 왜그래" 오히려 고통의 주체를 타자보다는 자신에게 돌려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러지 말자. 고통이 있어도 말하지 말고 듣지 않는 것이 속편하다는 것이다. 


5년전 쯤이다. 어느날 갑자기 6촌 동생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밝은 사람이었는데 43년을 살면서 결혼 한 번 하지 않았고, 변변한 직장은 없었지만 듣기로는 워낙 밝은 성격이라 그럭저럭 문제가 없는 걸로 알았는데, 갑자기 세상의 끈을 놓아버렸다. 죽기 얼마전 당숙모에게 웃으면서 "엄마 그만 죽자"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맘이 너무 아팟다. 어릴 때 곧잘 사내들 틈에서 씩씩하게 어울리곤 했던 사람인데, 이젠 세상에서 그녀를 볼 수 없다. "엄마 그만 죽자" 란 말을 당숙모가 "엄마 살려줘 더이상 힘들어 못살겠다" 는 말로 들었으면 어땟을까. 당숙모 역시 땅을 치며 후회했겟지만 우리는 그러한 구조사인을 알아차리는데 너무 무감각하다. 


20년전 내가 경제적인 이유로 힘들어하고 방황할 때 어머니와 심하게 다툰적이 있다. 화를 내면서 가지고 있던 그릇을 바닦에 던져 당신의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는 것을 표현했다. 처음보는 어머니의 난데 없는 폭력적인 모습에 놀랐지만 난 도리어 또 다른 그릇을 가지고 와서 깨어진 그곳에 던져 버림으로 더 큰 폭력을 행사해버리고 말았다. 그런 항변을 여태 본적 없던 어머니가 놀라고 이내 또 다른 그릇을 깬다. 나도 깬다. 둘은 고함을 지르다 결국 부둥켜 안고 울어버렸다. 서로에게 있었을 고통의 크기를 그제서야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고,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그 맘이 아파 서로 통곡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채식주의자" 엔 가족이 없다. 몇년간을 같이 살아온 남편은 칼로 손목을 그은 영혜의 충격적인 자해모습을 목격한 후 2년만에 헤어져 버렸고, 아버지는 "한번 먹어보면 다시 먹을 수 있을거야" 라며 강제로 팔을 잡고 입속에 고기를 넣어 영혜의 고통을 자기 식대로 가부장적 폭력으로 해결하려 했다. 언니인 인혜 역시도 동생 영혜의 고통을 정신병원이라는 격리된 공간으로 보냄으로서 자신과 영혜를 분리 시켜 해결하려 했을 뿐이다. 모두가 남이었다. 

문제가 있는 가족은 항상 다른 가족들에게 버거운 존재다. 질풍노도의 청소년이 그럴 수도 있고, 직장에서 구조조정의 칼을 맞고 방황하는 가장이 그럴 수도 있고, 전업주부로 자신의 존재가치에 한숨쉬는 주부, 치매로 벽에 똥칠을하는 노부모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가족이기에 이해하고 공감해주기 보다는 오히려 더 외면하고, 또는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겨버리는 경우가 더 많다. 모든 것이 용납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화를 내고 억압하고 짓누르는 것까지도 가족이기에 부모이기에 자식이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거기엔 엄청난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다.  


폴 몰로니란 심리학자의 "가짜힐링"이라는 책이있다. 심리치료를 하는 사람들 중에 정신과 의사나 심리치료사 처럼 전문적인 심리학을 공부한 사람들에서 보다 오히려 따뜻한 마음으로 들어주고 피상담자의 고통에 공감해주는 친구나 이웃 사람들이 오히려 심리적 안정과 치유에 더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를 제시했다. 


들어주고 공감하는 것만으로 더욱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우리는 들어주고 그래서 공감하는 일에 너무도 인색하다. 하지만 그러한 일에 한 생명을 구할 수 있고, 또는 엉망이된 내 가슴이 정리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말이다. 공감하는 관심이 생의 마지막에서 외치는 구조사인을 들을 수 있게한다. "살려줘"


영혜가 냉장고에 든 모든 고기를 쓰레기 봉투에 넣으면서  "꿈을 꿨어"라는 말을 했을 때 남편이 그렇게 허겁지겁 출근을 서두르지 않고 오롯이 영혜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면 어땟을까? 꿈을 다 이해하진 못했더라도 들어주고 마음을 다해 안아주었다면 영혜의 인생이 그렇게까지 비극으로 결말이 나진 않았을 지도 모른다.


요즘 난 공감이란 말을 실감나게 느낀다. 아마도 나이가 들면 여성호르몬이 분비되서 그런가 보다. 눈물도 자주 흘린다. 영화를 보면서, 책을 보면서, 그리고 음악을 들으면서. 타자의 아픔이 상상이 되고 그 아픔이 느껴진다. 갑자기 세상을 떠난 직원의 아버지 장례식장에서도, 70평생을 고생만 하고 살아오신 어머니도, 그런 어머니를 물질적으로 행복하게 해주지 못해서 늘 미안한 아버지도, 군에서 고생하는 아들도,  5.18 민주묘역에서도, 팽목항에서도, 그리고 생을 달리한 쌍용자동차 노조원들.................. 세상에는 함께 아파해야할 사람들이 너무 많다. 같이 아파해야만 다시 똑같은 아픔이 오지 않을 거라 믿는다. 


오늘은 퇴근해서 "어머니 사랑해요" 한마디 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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