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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Jun 12. 2016

소년이 온다

5.18 민주항쟁의 에필로그

2016년의 오월은 조용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한차례 여야간 공방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그닥 오월이란 것을 떠올리기엔 표면적으로 이 나라는 너무도 조용했다. 국가가 정한 기념일인데도 특별방송도 없었고, 그날을 되새겨 기념할 만한 행사도 딱히 알지 못했다. 국가가 정한 기념일에는 매번 기념식이 있고, 그 기념식은 딱히 공휴일이든 아니든 한가한 오전에 그 행사를 중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왠일인지 5.18기념식 중계는 없었다. 방송들은 너무나 조용했고 5.18은 여느때와 다름없는 5월의 어느 수요일이었다. 여기가 대구라서 더욱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그날을 얘기 하지 않는다. 금기사항이라도 되는 것처럼 쉬쉬하고 지나갔다. 죄라도 되는 것처럼 휴대폰을 다리가랑이 사이에 올려놓고 팩트TV로 기념식 중계를 봐야 했다. 물론 근무시간에 딴짓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중요한 중계방송은 당당히 TV를 켜놓고 보지 않았던가. 우리는 이렇게 소극적이다.


얼마전 아는 지인과 하꼬방같은 치킨집에서 치맥한잔을 한적이 있다. 그날은 노무현대통령의 7주기라 봉하마을 추도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지인과 뒷풀이로 한잔한 자리였다. 뜨거운 한낮의 기념식과 다녀온 감회를 얘기하느라 두사람은 열을 내어 약간은 격앙되게 말하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몇몇의 남자들이 불쑥 큰소리로 한마디하며 우리의 귓가를 때리고 간섭한다. "아우 난 노무현에 노짜만 들어도 경기를 한다" 순간 우리자리는 얼어버린다. 이건 또 무슨 폭력이란 말인가. 누가 들으라고 했던 것도 아니라서 같은 자리가 아니면 알아들을 수도 없었을 우리의 이야기가 그들에게 무슨 큰 방해거리가 되었을까? 다만 드문드문 들렸을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그들은 싫었던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면서 ... 내 앞자리에 앉아 있던 지인은 금세 닭똥같은 눈물을 흘린다. 도데체 노무현이 당신들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이건 너무하지 않느냐는 억울함의 표출이다. 그러나 우린 그들에게 항변하지 않았다. 그냥 목소리를 낮출 수 밖에 없었다.


교보문고 홈페이지에서 맨부커상을 받았다는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검색하면 같은 작가의 책으로 "소년이 온다"가 보인다. 소박한 여자의 치마같은 표지가 마음을 끈다. 오히려 한국에서 한강은 "채식주의자"보다 "소년이 온다"로 더욱 주목받는 작가라던데 어떤 분은 만일 "소년이 온다"가 번역되었더라면 더 큰상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고 한마디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두 편의 소설 모두가 인간의 폭력과 고통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같은 맥락이겠지만 그 크기와 집단성에 대한 충격적인 고통은 아마도 "소년이 온다"가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치 읽는 독자가 휘두르는 곤봉과 대검에 찔리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한다. "채식주의자"가 고통을 받는 한여인의 영혼에 대한 공감, 즉 타자로서의 공감이라면 "소년이 온다"는 직접적으로 내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한 혼란과 참을 수 없는 실제적 공포감이었다. 그것은 마음으로 느끼는 공감이 아니라 내 피부가 현실에서 찟기어 지거나 곤봉에 머리를 맞아 피가 솟구치고 얼굴이 함몰되는 느낌이었다. 아픔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지속대는 고통 언제 끝날 지 모르는 빰을 세다가 결국 포기해버리고 마는 그 허망한 존재감을 느꼈다.


오랫만에 맞은 3일 연휴의 가운데, 6월5일 난 5.18 광주묘역을 가기 위해 광주로 향하는 시외버스를 탓다. 대구에서 광주를 가는 시외버스는 고속버스에 비해 2시간이나 더 걸렸지만 난 마침 읽고있던 책을 다 읽을 요랑으로 일부러 시외버스를 택했다. 오후 3시 묘역에 도착한 나는 마치 관광지에 들른 사람처럼 이방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동화되지 못하는 주변인이며, 방관자 같은 내 모습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색했다.

5.18민주묘역 입구. 전체적으로 깨끗하고 정돈된 느낌이다. 어찌보면 동작동 국립묘지보다 더 정갈하고 더 숙연한 분위기다.

떨리는 마음으로 민주의 문이라는 정문을 들어설때 안내에 앉아 계신 여자분이 웃으며 가볍게 목례를 한다. 마치 아는 사람을 맞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쑥쓰럽다. 아는 사람으로 착각했던지 아니면 내 행색이 조금쯤 어색해 보였을까. 어쨋든 그 따스한 미소가 잊혀지질 않는다.

문을 들어서자 커다란 추모탑이 보이고 그 앞에 참배하는 분들이 여럿보인다. 항시 향을 준비해두는 것같다. 이곳을 찾는 참배객들은 너나 할 것없이 그 앞에서 남의 시선같은건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그자리에 서있었다. 많은 곳을 다녀봤지만 이렇듯 진심어린 참배를하는 시민을 보는 것은 흔치않는 일이다. 동작동 국립묘지는 그렇치 않다. 동작동은 자신의 혈육이나 관계가 있는 묘지 앞에서만 헌화한다. 하지만 여긴 그렇지 않다. 적어도 5.18민주항쟁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아픔을 공감하는 분들이 찾는 만큼 참배하는 진심도 그 깊은 애도의 마음도 그 깊이가 다르리라 생각된다. 참배객들은 나 대신 저곳에 누워있는 시민들을 애도하는 것이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여 4명의 참배가 끝나고 부부로 보이는 두분이 분향대 앞에서 묵념할 준비를 하고 계신다.

추모탑뒤로는 많은 5.18희생자들의 묘가 질서정연하게 오와 열을 맞추어 있다. 이렇게나 많은 묘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확인되지 않은 희생자까지 2,000명에 달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각 묘비우측으로 희생자의 사진이 동그랗게 각인되어있다. 어떤 분은 초로의 할아버지, 그리고 또 어떤 분은 평범한 아낙네의 얼굴, 고등학생, 심지어는 초등학생까지. 그분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다 서있던 다리가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가슴은 쿵쾅대었고 마음은 이미 통곡에 가까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순간 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나는 이곳 광주의 아픔을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사람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정말 간첩이 개입한 폭도인 줄 그당시엔 그렇게 알았다. 매년 5월마다 벌어지던 5.18관련 시위에도 나는 나의 불편함이 싫어 고개를 돌렸다. 5.18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먼나라의 다른 나라 사람의 얘기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서야 난 진실을 외면하지 않을 용기를 얻었다. 시기적으로 딱히 구분할 수는 없으나 어느날 갑자기 난 부끄러운 자신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것은 아마도 양심을 일깨워주는 책과 알고자 하는 노력 때문이지 않았을까. 나와 거의 나이가 비슷해보이는 분의 묘비앞에 두손을 모으고 그 분을 생각하며 한참을 서있었다. 내가 그날 그곳에 있었다면 나역시 여기에 묻힐 수 밖에 없었을까? 무자비한 곤봉을, 서슬퍼런 대검을, 증오없는 폭력을 견딜 용기가 있었을까. 그러면서도 온전히 내 몸을 그들의 폭력에 고스란히 알몸처럼 내놓고 싸웠을까. 하지만 분명 내가 그자리에 서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망설이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 곤봉에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고 촛점없는 눈으로 아스팔트에 누워 연기로 어지러워진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나를 발길질하는 군인들의 군홧발에 내 옆구리가 차이고 밟혀서 숨을 쉴수가 없었다. 차츰 끊어지는 숨소리 아직 실날같은 날숨이 느껴짐에도 짐승의 사체처럼 군용트럭에 실려가 묻혀지고 불태워져 연기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회벽에 붙은 대통령 사진을 올려다 본다. 얼굴은 어떻게 내면을 숨기는가, 그녀는 생각한다. 어떻게 무감각을, 잔인성을, 살인을 숨기는가.-77p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었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관을 이룬 것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 114p


돌아오는 길 먹먹한 마음을 달랠 수없었다. 적을 향해 훈련하고 연습했던 공수부대의 총과 칼이 오히려 그들이 지키고 보호해야할 국민들을 향해 어두운 총구를 들이 대는 환상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그 어두운 총구가 아직도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이 지옥같은 현실들을 향해 있다. 눈을 감았다. 그러나 환상이 오히려 뚜렸해진다. 눈을 감아도 보이는 것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2009년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20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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