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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Jun 26. 2016

미학을 읽다.

미학오디세이 - 진중권

2년전 광주에 간김에 꼭 한번은 가보고 싶었던 용봉동의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을 찾았다. 전시관 앞마당에 들어서면서부터 입구의 한면을 거대하게 장식한 옥토퍼스 그림과 그 옆면을 차지한 기괴한 조형물들에 놀라고, 그래서 돌로만든 의자와 가로등 가로수까지도 전시물처럼 보이는 문화충격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멍하니 서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규모에도 놀랐지만 하나의 행사를 20년간이나 꾸준하게 지속시킨 걸보면 광주시가 비엔날레에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그림을 볼 줄 모르는 그래서 그림에서 만큼은 문외한이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과연 무었을 말하는 것인가. 시대와 역사를 요리조리 버무려 적절하게 해석해내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그림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면 되는 것인가? 그런데 그림이란 것이 꼭 아름다운 그림만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광주비엔날레에 전시된 회화와 조형물들은 그 어떤 것도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의 것들은 폭력적이었고 공포영화속에 나오는 하드고어장면처럼 잔인하며 그로테스크하게 보인다. 우리는 이러한 현대미술 앞에 섰을때  당혹스러워한다. 익히 알고있는 고전적 예술은 대부분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어찌보면 일반인의 상식이기도 하다. 조화롭게 잘 인테리어된 집안의 거실 또는 복잡한 사무실의 한벽에 걸려 마치 창문을 열고들어온 아름다운 풍경처럼 우리의 정신을 만져주기도 하고 그러한 자신을 바라보며 흐믓해하기를 바라는 장식품아닌가.

그러나 세상에는 이런 그림들 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기호와 선들 또는 캔버스에 아무렇게나 뒤섞인 물감들로 표현된 난해한 작품들이 더 많다. 우리는 그 앞에서 대부분 끔찍한 혼란을 경험한다.  이건 머냐? 이건 도데체  무얼 그린건지? 작가와 독자는 소통되지 않는 투명한 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처럼 그 소통의 부재로 고통스러워한다. 그정도면 그 앞에서 나의 무지를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이건 숫제 감상이 아니라 작가가 던지는 일방적인 폭력에 화가 치솟기도 한다. 실제로 비엔날레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느껴지는 이러한 느낌은 4관까지 올라가 기어코 남은 작품을 다 보아야 하는것이 무의미할 것같기도하고 그래서 아예 포기해야할지 망설여 기에 충분하다.


그림 즉 회화라는 것과 조각이라는 것은 당연하게도 자연의 한모습을 모방하다시피 그리거나 약간의 변형이 있더라도 아름다운 색채에 음~~~ 하고 긍정하게 해주는 것이 그 역할이 아니던가. 이것이야말로 그림을 볼 줄 모르는 나와 같은 일반대중들의 객관적인 생각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초현실주의로 대표되는 알 수 없는 그림들과 조각, 퍼퍼먼스는 그것을 창작해낸 작가의 의도를 알아야 어느 정도 감상할 수 있는 힌트라도 얻게 된다. 사전 지식이 있거나 안내자의 안내가 없다면 그 작품들이 혹 쓰레기 더미에 있다한들 우리는 그 가치를 눈치 조차 챌수 없을 것이다.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는 이런 고통속에 내리는 한줄기 해법 같은 책이다. 진중권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대한민국에서도 알아주는 토론쟁이다. TVN의 SNL에서도 여러번 패러디 했다시피 논쟁에 있어서 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지식과 강단을 가졌으며 어떤 면에서는 독선적인 사람이다. 그래서 난  진중권이라는 기대?와 선입견속에 책을 열었다. 어쩌면 20년전의 그였기에 오히려 더 패기있는 모습을 기대했던 나는 독자에게 최대한 눈높이를 맞추려 애쓰는 진중권교수를 만난다. 유럽으로 갈 항공권을 살돈이 필요해서 이책을 썻다라고 하니 어쩌면 그의 궁핍과 절박함이 이처럼 겸손하게 쓰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상당히 대중적으로 쓰려고 작가 스스로도  노력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하지만 그건 진중권교수입장이고 사실 보는 사람은 여전히 어렵다. 문외한이라 더욱 그렇겠지만 미학이란 것이 본질적으로 그렇게 대중적이지 못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고 난 후엔 미로에서 어렴풋이나마 길을 찾은 느낌이 든다. 세권으로 된 책을 모조리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적으로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보자면 열쇠를 얻어 문을 열고 미학의 세계라는 낮설고 다른 차원의 세계로 입문하게된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프랑스로 날아가 그곳에 전시된 모나리자를 보고싶어지고 베르사이유 궁전을 보고싶은 열망을 가지게 한다. 다시한번 광주를 찾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가 11회째 광주비엔날레가 열리는 해이다. 올 9월에 시작한다니 또 한번 그곳에 가서 조금은 교육된(?) 눈으로 작품을 보고싶어진다.


미학오디세이는 알타미라동굴의 원시 회화에서 부터 시작해서 고전주의와 지금의 모더니즘을 거쳐 초현실주의까지 인간의 전시대를 아우르는 미학의 세계사다. 미학에 담긴 철학적 담론과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건축물에 담긴 진정한 미학의 세계를 이야기 한다. 그 긴여정을 3권의 책으로 함축하기엔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많이 팔아야 했으므로 쉽고 대중적 입맛에 맞게 쓰여졌다. 그림이 절반이다. 그래서 지루하지도 않다.  출판한지 20년이 넘은 책이지만 아직도 새로운 독자를 양성해내고 있으니 좋은 책인것만은 틀림없을 듯 싶다.


"인간은 거대한 탑을 쌓아 신에 도달하려다 신의 노여움을 산뒤로, 인간은 아담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사물의 참모습을 은폐하는 바벨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인간은 매사에 시시콜콜 설명이 필요하게 되었다. 인간에게 굳이 철학이 필요한 건 아마 이때문이다"


진중권은 미학오디세이를 통해서 작가와 독자가 아담의 언어를 찾기를 바라는 것일까? 인간이 사물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는 언어를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속에서 본다고 했다. 작가가 아담의 언어로 자기의 작품속에서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독자는 고스란히 설명없이도 이해하게되는 아담의 언어. 서로 같은 언어를 써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예술작품이 주는 즐거움은 감각적 즐거움이 아니라 재인식의 즐거움이다.  즉 작가의 의도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 스스로 작품을 보고 재인식하여 독자가 직접 참가하여야 하는 놀이가 될 때 가치가 있다고 한다. 작가와 독자가 벌이는 언어적 대치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작가는 독자를 부른다. 독자는 이때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는 것이다. 미학오디세이를 통해서 조금쯤 준비된 독자가 된 나는 여전히 추상적이고 난해한 예술작품들에 당혹해 할 것이지만 그래도 전과 같지 않을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재인식의 즐거운 놀이에 빠져볼 요량이다. 9월 광주 비엔날레가 기다려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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