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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Dec 13. 2016

높고 푸른 사다리

사랑아 언제까지나 거기 남아있어라 - 공지영

공지영작가의 르포르타지 의자놀이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공지영작가를 읽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시대를 보는 칼날이 너무 날카로워 마음에 수없이 많은 베임의 상처를 얻게되었습니다. 권력을 잡은 자들의 잔인한 폭력과 터무니없이 조작된 사실 그리고 그 억측 아래 희생되어간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접하면서 권력이란 도데체 어디까지 국민들에게 잔인해질 수있는가를 끊임없이 묻게되었고 그 허망한 절규를 들으며 많이도 울었습니다. 그것은 같은 국민으로서 느껴지는 통증이었기에 더욱 크게 다가오는 아픔이었고 분노였습니다. 


얼마전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는 세종도서 선정보급사업 심사에서 최종 탈락된 여러 도서 중에 공지영의 소설 "높고푸른 사다리"가 최종 탈락되었다는 한겨레 보도를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 외 여러 소설가들의 책들과 세월호 관련 책들이 정부의 사전검열을 받아 최종 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아직도 정부의 사정과 감찰의 결과로 수많은 예술가들이 사상적 블랙리스트에 올라가는 구시대적 공안정치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며 참으로 허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청와대에서 느끼는 그 자괴감이 무었인지는 모르나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국민의 자괴감은 깊은 구렁으로 빠져 온몸이 허물어지고 녹는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높고 푸른 사다리"를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푸른의자에서 만난 날카로운 칼날의 일설을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거기엔 정부에서 그렇게까지 호들갑스럽게 감시하고 제지해야할 사상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몇줄 되지않는 민중운동이나 해방신학같은 것들이 보이긴 했지만  한때는 운동권 금서였던 책들마저도 거리낌없이 읽히어지는 지금의 시대에 비추어보면 그건 그저 소설의 일부분일 뿐이었습니다. 소설의 한부분을 받혀주는 가지였으며 그 몇줄이 소설의 전체 분위기나 흐름을 좌지우지 하지는 않았습니다. 소설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의 한 표현일 뿐이었습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최순실게이트가 폭로되었습니다. 근 한달 반동안이나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뉴스를 봐야했고 주말엔 집회에 가서 촛불을 들어야만했습니다. 그러니 한달에 몇권씩 읽던 독서 습관도 조금씩 나태함을 보이기 시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권의 소설을 근 한달 반여만에 읽었습니다. 박근혜와 최순실 게이트가 이렇듯 평범한 국민의 소박한 습관마저 빼앗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조금씩 읽어가던 책을 어제서야 다 읽게 되었습니다. 20부작정도 되는 미니시리즈 드라마를 본 느낌입니다. 하긴 처음 읽기 시작하면서 소설이 드라마로 제작되어도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책속에 숨겨둔 공지영작가의 의도가 그대로 반영된다면 말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찾아본 서평들은 젊은 카톨릭수사 정요한과 그의 여인 소희와의 금지된 종교적 사랑이야기라는 관점에서 본 글들이 많았습니다. 사실 그러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 책을 읽으면서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떠올리곤 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남녀간의 사랑이 주는 애뜻함을 초월한 사랑이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책속엔 수많은 사랑의 여러가지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인간과 인간의 사랑, 남녀간의 사랑,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 등 책속에 녹아있는 사랑의 모습들을 생각하면서 사랑이라는 것이 어느 한 곳에 국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것이며 인류가 그 종을 연명해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원천이라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어떤 궁극적인 의미, 다시 말해 초월적인 의미를 가져야만한다. 인간은 그 초월적인 의미를 알 수 없지만 그저 믿어야만 한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모르 파티(amor fati)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공지영이 소설속에서 인용한 빅터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쓰인 한 구절입니다.


소설속에는 이러한 운명적 사랑에 직면해 그 사랑을 믿고 죽음으로 실천했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작가가 쓴 후기를 읽고 알게 되었지만 몇 명은 실존했던 인물들이기도 했습니다. 2차세계대전 중에 독일에서 한국으로 파견되어온 풋나기 수사 토마스, 그는 일제 식민지하의 원산으로 발령받아 척박한 이땅의 선교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는 헐벗고 배고픈 이 땅의 민중들과 함께 하였고 이 나라의 희망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해방되어 동족상잔의 비극이 있었던 그때에도 그들은 이 땅을 떠나지 않고 공산주의 아래 온갖 수모를 한국인들과 함께 감당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했던 요한 루드비히라는 신부의 말은 사랑이 무었인지를 단적으로 말해줍니다. "우리가 천사의 말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예언하지도 못하고 지식도 없고 심오한 진리를 깨닫지 못해도, 심지어 하느님 말씀을 전하지 못한다해도, 우리가 우리의 몸을 다 바치고 있지 못한다 해도, 사랑만 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는 거겠지" 사랑을 믿기에 그들은 운명적으로 자신의 존재와 그 존재가 해야할 마지막 도구로서의 쓰임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았던 수많은 선교사들이 그러했습니다. 단지 종교적인 이야기로서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들은 그들이 믿고 모든 것을 드리기로 약속한 신의 의도를 온맘과 온몸으로 받아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했던 그 고귀한 사랑의 행위들은 이땅의 수많은 생명들에게 살아가야할 의미를 깨닫게 하였고 그들이 준 문명과 지식과 사랑의 실천으로 인한 고귀함은 그렇치 않았을때와 비교했을 때 다분히 운명적 사랑이라 할만했습니다. 운명은 우연이기도 합니다. 나비효과로 의미가 이해되어질지도 모릅니다만 이국땅에서 온 그들의 헌신에 가르침을 받아 이 땅의 수많은 양심적 지식인이 태어나고 교화되기도하여 어쩌면 수많은 생명을 살렸을지도 모릅니다. 


그 운명적 사랑의 절정은 소설의 후미에 등장합니다. 바로 흥남부두에서 일어났던 기적같은 사건입니다. 7,400톤급 화물선인 빅토리아메러디스호의 선장이었던 마리너스수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4후퇴 당시 제트연료를 싣고 흥남부두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가 그 유명한 14,000명의 피난민을 태우고 흥남부두에서 거제로 항해해와 그 많은 사람을 단 하나의 주검도 없이 내려놓은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논리로 치면 그 배가 그 항구를 무사히 빠져나와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모두를 남쪽 땅에 내려놓을 확율은 1000만분의 1도 되지 않았어요.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저는 때때로 생각합니다. 어떻게 그 작은 배가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태우고 어떻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많은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말입니다. 그러면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검은 바다 위에서 하느님의 손길이 제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저에게 전해옵니다."

여기엔 수많은 운명적사랑을 보여주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는 어느날 갑자기 빅토리아호 선장으로 임명되었고, 이름도 낮선 한국의 흥남부두로 가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그는 자신의 배에 실린 제트연료를 하역할 수 없음을 해군대령으로 부터 듣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흥남부두를 떠나라는 명령과 함께 영하20도의 추운 겨울 바다에서 한없이 떨고있는 피난민들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그때 해군대령은 명령은 아니지만 저기에 있는 생명 몇명만이라도 태우고 갈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는 고민합니다. 추운 바다 언제 도착할 지도 모를 남쪽으로 식량도 물도 없이 어떻게  이들을 태우고 남쪽으로 피난을 시킬 수 있을지. 그러나 그는 푸른 사다리를 부두에 내립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화물칸 구석구석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렇게 죽음을 건너 생명의 사다리를 오른 사람들은 물도 식량도 없이 사흘을 칠흙같은 어둠을 참고 견디며 거제도에 도착합니다. 한사람의 소중한 결단이 14,000명이나 되는 수많은 사람을 살린 것입니다. 당시 생명을 구한 수많은 사람들이 7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살아가며  무수히 많은 생명을 잉태하고 또한 태어나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운명적으로 온 그 사랑의 행위는 어쩌면 수십만 아니 이 땅위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운명의 테두리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전율마저 느껴집니다. 


선택의 기묘한 순간에 서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요한 수사와 소희와의 사랑도 어쩌면 같을 수 있습니다. 신의 의도에 메여 있는 운명이라 생각하면 조금쯤 건조할 수도 있으나 사실은 우리의 삶이 운명 속에서도 생명의 꿈틀거림처럼 살아있다는 것을 또한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적인 잣대로 들이대자면 한없이 복잡하고 심각해지겠지만 삶의 기로에 사랑이라는 한가지 기준이 내 삶은 물론이려니와 타자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그들의 남아있는 삶이 사랑으로 인해 풍요로워 질 수도 있으며, 때론 생명마저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는 순간의 희생이 인간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가치를 확인시켜주는 것에 다름아닐 것입니다.


어제 밤 개봉된지 얼마되지않은 판도라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메마른 눈가에 물기를 보이고 말았습니다. 비단 영화로 보는 허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타인을 위해 망설임없이 자신의 생명을 바친 수많은 의사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영화속의 대사처럼 책임지는 국가의 모습은 없고 국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땅에서 살아갑니다. 결국 국민을 살리는 그곳에는 또 다른 내 이웃이 있고 그 이웃이 희생되고 나서야 또한 수많은 사람의 생명이 다시금 피어날 수 있는 곳에서 살아갑니다.


마지막으로 세월호 민간잠수사 김관홍씨가 세월호 청문회에서 했던 말이 생각나 옮겨 적습니다. 다시금 명복을 빕니다.


저희 법적인 논리 몰라요. 돈을 벌려고 간 현장이 아닙니다. 돈을 벌려고 간 현장이었으면 우리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루에 한 번밖에 들어가면 안 되는 그 수심에서 많게는 네 번, 다섯 번…. 법리 논리 모릅니다. 제발 상식과 통념에서 판단을 하셔야지, 법리 논리? 저희가 간 게, 양심적으로 간 게 죄입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타인한테 이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재난에도 국민을 부르지 마십시오. 정부가 알아서 하셔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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