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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드 Apr 04. 2016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 사사키아타루

  "그의 책을 읽었다기 보다 읽고 말았습니다.
읽고만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있는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보이고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사키아타루, 이 젊은 일본 철학자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야전과 영원"이라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엮어 자음과 모음에서 펴낸 900apge짜리 책을 처음 접했을 때입니다. 두툼한 볼륨에 청색과 흰색으로 된 양장본인데 이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책을 고를 때 그 책의 디자인도 구매하는데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책의 디자인에 신경을 쓴 책들은 번역서이든 아니든 출판사에서 고민한 흔적이 많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래 내용은 야전과 영원을 손에 넣었던 날 일기에 적은 내용입니다.

    

아침부터 무었에 심하게 홀린듯 사사키아타루의 야전과 영원이란 책을 찾았다. 두꺼운 볼륨에 어울릴 만한 35,000원이란 책의 가격도 알고 있던터라 고민스러움이 더했다. 어쩌면 움베로토에코의 책을 읽었다는 거만함이 잠재해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리석은 거만함 조차도 이 무지막지하게 두텁고 난해한 책을 선듯 사게 하지는 않았다. 블러그를 뒤지기 시작한다. 어떤 면에서든 읽어야할 적절한 이유와 필요성과 당위성을 찾아야 했다. 독서는 도끼다라고 외쳤던 카프카의 일설처럼. 하지만 많은 블러거들 조차도 이 책은 한번쯤 읽어볼만하다는 알듯 모를 듯한 이유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난 이미 이 책에 마음을 뺏긴 후였다. 어떤 블러거는 이책의 서문을 읽다가 이 책을 사게 되었다고 후회섞인 고민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꺼운 책에 빠져들어 머리 아파가며 허우적기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책을 쓰는 사람은 집필하는 동안 직면하는 기댈 곳없음을 감당해야 한다. 여기저기 쓴글을 긁어 모으는 것이 아니라 일관성있는 책을 쓰려한다면 더더욱 그래야한다. 아는 내용을 아는 방식으로 쓴다면 그것은 쓰는 것이 아니다. 물론 개괄적인 계획은 있다. 오랫동안 작성해온 노트도 있다. 자료도 충분히 모았다. 하지만 쓴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연성에 몸을 맡기는 일이다. 모르는 내용, 알리가 없는 내용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망연해 하는 일이다. 깊이 자실하는일이다" 오후 3시쯤 한나절을 괴롭혔던 고민을 묵살하고 교보문고의 바로드림코너에 책을 주문하고 말았다. 이미 유명한 책중의 하나인 잘라라 기도하는 두손을 과 함께. 대구점에 재고가 없기를 얇팍하게 기대하면서. 하지만 그책은 3층 인문학코너에 있었고 교보문고에 마련된 카페에서 그책의 몇장을 읽었다.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알 수없는 어려운 활자들과 익숙하지 못한 일본식 한자가 그렇치 않아도 침침한 눈을 파고들어 어지러운 머리속을 후벼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역시 그 책의 서문이 기대를 갖게한다. 아는 내용을 아는 방식으로 기대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쓰는 것과 읽는 것을 나역시 나 아닌 다른 우연성에 기대고 싶은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어쨋든 이 책에 1월 한달을 맡기고 싶다. 끝까지 읽기를 고대하면서 ....


읽기위한 마음의 준비

결론부터 말하자면 "야전과 영원"은 아직 서가에 꼿혀 읽기를 기다리는 책이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함께 구매했던 또 한권의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읽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읽기에 대한 텍스트라고 해야할 것같습니다. 사실 읽는 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요즘인터넷으로 쉽게 책을 구매할 수있다보니 원하는 책은 언제든 하루나 이틀정도면 독자의 손으로 들어옵니다. 책도 홍수를 이룹니다. 자기계발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책이 나와 독자를 기다립니다. 삶의 질을 높여보기 위하여 책에서 정보를 얻기도 하고 말하기 위하여 유익한 지식을 쌓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읽기가 단순히 정보를 얻기위한 수단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 우려를 표합니다. 읽는 다는 것이 정보를 끌어모으기 위한 수단이 될때 자신의 생각은 없어지고 타인의 명령 곧 그 정보라는 명령에 예속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런 책읽기는 정보에 착취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읽는 다는 것은 미쳐버리는 거라 말합니다.


"왜 사람은 책을 성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왜 책에 쓰여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요? 왜 읽고서 옳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채 '정보'라는 필터를 꽂아 무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일까요? 아시겠지요. 미쳐버리기 때문입니다."   


아타루는 읽는 것은 고독이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라 말합니다. 저자의 꿈에 자신을 투영하여 아무도 없는 고요한 곳에서 철저히 세상을 배제한 채로, 읽어버린 옳다고 생각한 그 일에 대하여 고독이 하는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독서가 이처럼 전쟁에 참여하는 병사의 비장감 마져 느껴지는 것이 과연 우리 일반 독자와 상관이 있는 일인지는 모르겟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읽는 모든 책이 그러하진 않을거 같습니다만, 가끔은 우리가 읽는 책에서 자신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오르고, 거울을 보는 것처럼 그 속에 배열된 언어들에서 섬뜩함마져 느껴진다면 외면하지 말고, 읽고난 후 철저히 고독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그 책에 다가가는 도중에 아무리 꼬불꼬불 구부러지고 빈둥빈둥하고 우물쭈물하고 어슬렁어슬렁하더라도 최후에는 고독한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끝에 어떤 거래가 가능하다고 해도 그 전에 작자와 독자사이에서 처리하지 않으면 않되는 하나의 일이있다" - 버지니아 울프


저자인 사타루는 이렇듯 책을 읽고 난후 고독한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며 책읽다는 것은 이정도로 대단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읽고 난 후 최후에 남게될 고독한 싸움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책을 읽는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자신과 적당한 타협을 해버리고 만다고 해도 어쩔 수는 없겠지만 읽어버렸다면 그 싸움에서 이겨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얀종이의 표면에 비치는 광기와 그것을 읽지 않겠다고 하는 자신의 방어기제에 동시에 저항하지 않으면 않됩니다. 끈기있게, 자신과 자신에게서 밀려나온 그 무수한 것을 최대한 쥐어짜 삐걱거리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읽는 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는 저자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방어기제가 작동할 만한 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아직 5장으로 구성된 책중에 1챕터도 지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읽어버렸다는 것은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책을 읽는 다는 것은 미쳐버리는 것입니다" "책은 혁명입니다" 등등 이런 말들을 읽어보면 두손의 손바닥을 편채로 자신의 삶에서 밀어버리고 싶어집니다. 이처럼 책읽기에서 말하는 방어기제란 다 아시겠지만 옳은 것을 읽고 부담이 되어 밀어버리고 싶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책읽기라는 것이 이처럼 가슴을 묵직하게 짖누르고 자신과 고독한 싸움을 준비 해야하는 무시무시한 것이라면 참 부담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너무나 쉽게 읽고 많이 읽어 다독이 자랑거리처럼 말하는 것 보다는, 무시무시하지만 작자와 처리하지 않으면 않되는 한판이 더 짜릿하고 즐거운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루터 책읽기와 쓰기로 세상을 혁명하다


아타루는 챕터2에서 책을 읽는 다는 것은 혁명이라고 말하며 루터를 이야기합니다. 16세기의 루터는 분명 고뇌하는 성직자였습니다. 면죄부와 교황청의 타락과 치부에 온 정신을 쏟는 교구와 부패로 만연한 카톨릭세계는 그야말로 죄악의 소굴이었읍니다. 당시 성서는 라틴어 또는 그리스어로 적혀있었고 공부하지 않은 수도사나 성직자들은 물론이거니와 하물며 일반인들에게는 성서라는 책을 너무나 신성시한 나머지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도 알 수도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루터는 성서를 읽었습니다. 책을 읽고 말았던 것입니다. 성서를 읽고난 후의 루터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진리에 대한 목마름과 그 갈증을 해소해 줄 깨달음을 위하여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을 시작합니다. 마침내 그는 95개조로 된 반박문을 걸고 그에 대한 대답을 기다립니다. 그것은 대단한 용기였습니다. 부패한 카톨릭 세계는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한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리어 그를 이단 중에서도 가장 상급의 이단이라는 의미로 "대이단"이라고 규정하고 탄압합니다. 하지만 루터는 위협에 대하여 도리어 자신이 생각하고 깨달은 것들을 책으로 쓰기 시작합니다. 성서를 번역하고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독일어로 번역하여 일반인들도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아타루는 이러한 루터의 종교개혁을 대혁명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독일어에서는 Refomation이라고 쓴다고 합니다. 책읽기와 그로인한 고뇌의 결과로 쓰여진 책들은 또한 읽히고 읽혀서 종교개혁을 이루어 낸것입니다. 책읽기는 회임이라고, 아타루는 카프카를 인용하여 이 책에 적고 있습니다. 책을 읽은 사람은 쓸 수 밖에 없고 쓴 책이 또다른 책으로 잉태되는 회임의 순간을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읽기를 다시 시작하면서 쓰는 것에 대한 욕구를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자세히 읽게 되고 그 읽은 것에 대하여 아타루가 말하는 것처럼 진지하게 고민하며 쓰기 시작합니다. 세상을 혁명하고자 하는 큰 욕망이나 그런 대단한 자신은 없습니다만, 읽고만 이상 쓰지 않을 수 없게된 요즘은 행복합니다. 작년말부터는 내 생에 처음으로 몰스킨이라는 노트를 사서 카페에서든, 달리는 기차안에서든 읽고 쓰는 것을 위하여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빽빽하게 볼펜으로 채워간 노트가 벌써 반이나 넘어갔습니다. 한번씩 지난 것을 들춰 읽어보면 그때 느꼈던 고민과 그로인한 고독이 참으로 재미가 있습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아타루는 어쩌면 이 책을 구상하던 시기의 처음부터 루터를 생각하고 있었던가 봅니다(그는 실제로 크리스챤은 아닙니다) 루터는 수도원의 수도승이었습니다. 그가 만일 성서를 읽고 깨닫고 뉘우친 그 순간에 오직 전능의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만 했다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루터는 성서를 읽고 깨닫는 순간 기도하는 그 손을 잘라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잘라버린 그 손으로 수많은 책들을 썻습니다.

아타루는 책이 혁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카프카는 책은 도끼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책은 사람의 정수를 쪼개어 혁명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아타루는 자신있게 말합니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 속에 존재하는 많은 혁명들이 이런 읽기와 쓰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봅니다. 피와 폭력으로 이룬 유혈혁명이 아니라 책으로 이룬 무혈혁명이라 얼마나 멋진 말인가요.


혁명이라는 것은 자기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어버리면 자연스럽게 철저하게 혼자인 자신을 깨닫게 되고, 그런 자신과 싸우게 되며 내면의 자기를 쥐어짜서 흔들어버립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삶을 바꾸고 변혁하게 됩니다. 한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세계를 변혁시킬 조그만 여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조그만 구멍이 커다란 댐을 무너뜨리게되는 시작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니 저 자신도 무슨 대단한 일이나 할 것처럼 비장해지긴 합니다만, 사실은 읽고난 후의 나는 조금씩 내 주변을 바꾸는 것으로 나의 변혁을 시작합니다. 옳치않았던 것을 깨달았다면 생각을 바꾸고, 나쁜 습관이 있었다면 과감하게 버려버립니다. 그렇다고 반세기를 살았던 인생에 무슨 큰 변화가 있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 작은 변화들이 아직 남겨진 공간들을 쾌적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적지 않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보다는 그 바라는 손을 잘라버리고 읽는 책들에서 자유를 얻고 싶은 봄입니다. 밖은 이미 벗꽃으로 만개했고, 죽은 가지끝으로 봄비가 생명을 밀어내고 있습니다. 책읽기가 죽은 것처럼 널부러진 몸에 생명을 틔우기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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