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의 말을 들을 것인가? MZ세대를 가르칠 것인가? 듣자니 회사가 망할 것 같고, 가르치자니 회사가 망할 것 같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GD(꼰대)세대의 수심이 깊다.
인류가 컴퓨터를 발명한 이후, 사람들은 많은 일을 컴퓨터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숫자의 처리, 글자의 처리, 사진의 처리, 영상의 처리, 이런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업무를 컴퓨터에게 맡기고 있다.
인공지능을 만들어 자율주행은 물론 입사자의 당락을 가르는 면접심사에까지 도입하고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던 탁월한 지능의 영역을 컴퓨터가 하나씩 가져가, 이제는 인간을 능가할 것이라는 불안감을 마저 만들고 있다.
한편에서는 컴퓨터와 인공지능의 발전이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고, 오늘날까지 ICT 기술이 지속적으로 발전해 온 것을 보면, 이는 모종의 이로움을 인간에게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에서는 불안감을 만들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로움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정보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에도 역설이 살짝 보인다. 이를 염두에 두면서, 인간의 위치, 조직과 리더의 위치를 연결해 볼 수 있다. 경영에서 역설은 어떻게 관계 맺고 있고, 경영이 DT의 파도를 어떻게 올라탈 것인가? 경영, DT, 역설의 관계를 역설 경영이라는 제목으로 탐색한다.
논의를 위하여 다음의 세가지 질문을 던져 본다.
인간보다 더 정확하고 빠르게 계산하는 컴퓨터에게 넘겨주기 싫은 것과 넘겨 줄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반대로, 컴퓨터에게 맡기고 싶고, 맡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성의 문제로서 인간이 컴퓨터와 다른 것은 무엇일까? 인간이 우월한 것은 무엇일까?
우선 각각의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대답이 가능하다.
최종판단(새로운 결정) - 처형/처벌, 공동체의 정의의 규정, 자신의 정체성, 자신의 감정
반복실행(정해진 대로 결정) - 제어, 시간이 많이 걸리는 큰 계산, 일부 기억, 찾아내기(검색)
우월한 것(생성) - 창시자(자유의지), 메타인지, 글로벌 시스템의 포착, 생식
위 세가지 질문에 대하여 답을 하고 보면, 이를 아우르는 명제는 다음과 같다.
컴퓨터 보다 '인간은 창조한다.' 역설을 품고 사는 인간, 역설이 없다면 어떤 창조가 가능할까?
패러독스를 표현하는 고전적인 문장인 거짓말장이의 역설은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이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면 거짓말을 한다는 말이 진실이 아니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거짓말을 한다는 말이 진실이 아니다.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은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 진실이다.’라는 말을 축약한 것이다. ‘만물은 죽음으로 탄생한다.’는 말을 연상시킨다. 평범해 보이던 하나의 진술에 수많은 추정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한다.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는 명제를 컴퓨터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참으로 볼 것인가? 거짓으로 볼 것인가? 그 이상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이미 인간이 프로그램한 대로 컴퓨터가 처리하면 충분한가? 참, 거짓을 구분하기 어려운 또는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명제를 컴퓨터는 학습을 통하여 답하는 능력을 보유하게 될 것인가?
컴퓨터가 이를 제대로 받아들이고 처리할 수 없다면, 이는 컴퓨터에게 해답을 구할 수 없는 인간이 붙잡고 있어야 할 최후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역설에 좀 더 관심을 가지면 좋을 이유이다.
역설을 꾸준히 연구해오고 있는 University of Cincinnati의 루이스 교수는 다음과 같이 역설을 정의하고 있다.
(Smith, W. K., & Lewis, M. W. (2011). Toward a theory of paradox: A dynamic equilibrium model of organizing. Academy of management Review, 36(2), 381-403.에서 인용함)
이런 역설이 삶, 생활, 경영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교리의 역설
'사랑하라.' '자비를 배풀라.' '인자해라.' 이러한 교리는 선지자의 깊은 사유 또는 생활 속에서 오랜 동안 터득한 바람직함 규범이 농축된 명제일 것이다. 당위로 보이지만 뜯어보면 진리의 기술이다. '사랑하면 당신의 당신이 기대하는 행복 또는 성공을 얻는다.'
기대하는 바를 얻으려면 사랑하는 것이 진리인데, 그렇다면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타인도 그 것을 얻도록 돕는 것이 사랑이다. 그리하여 타인이 사랑하도록 권유하고, 사랑하지 않을 경우 사랑하지 않는 것을 배척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을 배척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단을 이단이라고 말하면 사랑의 교리를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한한 자원과 능력을 보유한 인간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말하게 되기도 한다. 사랑하는 것에 사랑하지 않는 것이 포함되어 버린다.
[취재파일] 법정에서도 "예수 믿으세요"…사찰 방화 '그 여자', 법원 판단은?
출처 : SBS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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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의 역설
중립의 역설도 비슷하다. 중립은 퍼실리테이터에게 요구되는 본질적인 태도와 행동이다. 집단 업무의 상황에서 퍼실리테이터의 중립성은 '논의하고 있는 주제에 관하여 참여자의 어떤 의견에 찬성하거나 반대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중립을 지키는 것이 집단 업무를 풀어가는 데 있어 매우 바람직한 방법이라면, 중립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중립을 지켜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이는 왠지 불합리해 보인다. 중립을 지키는 것이 옳지만, 중립을 지키지 않는 것에는 중립을 지키지 않는 것이 옳다는 모순이 생겨난다.
중립은 상대에 대한 존중을 이미하는데, 여기서 중립을 존중이라는 말과 바꿔도 비슷한 결과가 생겨난다.
성공의 역설
경영학에서는 성공의 역설을 말하기도 한다. '조직에서의 성공과 실패는 내재적인 역설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 성공이 증대되고 있을 때, 실패의 위험도 잠재적으로 증대된다. 반대로 실패가 가중되면 성공의 잠재력도 키우게 된다 (Audia, Locke and Smith, 2000).'
하니버터칩이 엄청난 성공을 거둔 적이 있다. 생산라인을 늘리고, 당시의 수요에 맞추어 회사의 확장에 크게 투자하였다면 아마도 지금은 커다란 실패를 거두었을 것이다. 성공 속에 실패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인정의 역설
'존재 자체를 인정한다.' 말은 어떤 훌륭한 일을 하지 않아도 이미 훌륭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아무런 훌륭함이 없어도 없는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라는 두 개의 상반된 의미를 내포한다.
'존재 자체를 인정한다'는 것은 인간을 경쟁과 우열의 굴레에서 벗어나 지는 것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다는 루저의 인증이기도 한다. 루저로 여겨지는 불리함이 있을 때는 누군가 자신을 존재 자체로 인정해 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겠지만, 무엇인가 자신이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성취를 인정해 주지 않고 존재만 인정한다면, 그는 존재가 아닌 성취를 인정받지 못한 것으로부터의 괴로움이 싹트게 될 것이다.
리더의 역설
Servant leadership 이론이 있다. 먼저 봉사함으로써 성과(성공)을 이끈다는 개념이다. 섬김 리더십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달리 말하면 '노예로서 주인됨'이다.
리더가 방향을 제시하고 리더가 제시하는 방향을 팔러워가 따라 가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리더십으로 오랜 동안 인식되어 왔지만, 이제는 리더가 제시하는 방향에 의문을 품거나 반기를 드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듣는 리더를 강조한다. 듣는 것은 일견 노예적이다.
리더십으로 리딩할 수 없는 일이 생겨나고 있다. '팔로워십이 리더십이다.'라는 역설적 명제가 떠올려진다. 조직도를 뒤집어 놓거나, 서번트, 험블 리더십의 개념이 탄생하고 있다. 이끄라는 것인지, 따르라는 것인지 어떻게 결합하라는 것인지 모순적으로 다가온다.
자유의 역설
자유는 불평등을 만들고, 불평등은 자유를 구속한다. 출퇴근의 자유를 주면, 근무시간에 대한 개개인의 선택이 달라지고, 이로 인하여 근무시간이 긴 사람과 짧은 사람이라는 불평등이 발생한다. (여기서는 근무의 질은 고려치 않음)
이 차이를 서로 인정하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겠지만, 이 차이는 불공정하다는 인식과 감정을 일으킨다. '왜 나만 일을 많이 하지?' 이 자신이 부당하게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인식은 분노의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하여 이를 통제할 수단을 찾게 되고 결국 자유를 반납하고 제도에 구속되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근무시간을 정해 주세요.'
단독자로서 고유의 삶을 살고 싶지만,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동등항을 추구한다. 여기서 인간에게 내재한 같음과 다름의 이율배반적 동시 추구의 속성이 드러난다. 역설적이고 태극이 보인다. 한편 자유가 선택이라면 선택지라는 구속이 있어야만 가능해진다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선택지가 없이 선택 자체가 규정될 수 없다는 원리에 다다른다.
딜레마(Dilemma)
딜레마(dilemma)는 두 개의 선택지 모두 장점과 단점이 있어서 어느 것을 선택하더라도 유리한과 불리함이 비슷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을 말한다. 주식에 투자할 것이냐, 부동산에 투자할 것이냐? 결혼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선택 상황 등 쉽게 생활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사례이다.
양언성(Dialectic)
양언성은 헤겔의 dialectic을 구기욱의 이해에 따른 독특한 번역이다. 양언성은 어떤 하나의 개념을 말할 때 그 개념은 그 개념 밖의 반대 개념(여집합, sublation, aufheben, 지양, 거둠 - 전대호 번역)을 동시에 만들어 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반대의 개념은 원래의 개념과 다시 결합하여 새로운 하나의 개념을 탄생시킨다.
사랑이라는 개념은 사랑이 아닌 것이라는 생각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사랑 아닌 것은 너무나 방대하여 다시 원래의 사랑이라는 개념을 돌이켜 보면 새로운의 의미의 사랑*이 탄생한다.
태극(Taiji)
'태극(太極)은 무극과 같아서 혼돈 즉 무의 상태이기 때문에 만물이 시작되는 곳이다. 원인 무극이 음양(양의)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을 태극이라 한다. 음양으로 분리된 것은 태극이고 분리된 음양이 결합한 것(원)은 무극이다(둘이면서 하나고 하나면서 둘임. 둘이면서 둘이 아님).' (위키백과)
음은 수동적이고 변하지 않은 것, 양은 능동적이 변화하는 것, 이 둘이 결합하여 만물의 변화를 만들어낸다.
역설, 양언, 태극은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개념과 존재의 이해가 어떻게 형성되었는 지를 설명해 준다. 개념의 구분과 분화는 본질적으로 대립적이다. 따라서 흑과 백처럼 구분된 후의 개념과 반대의 개념은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느낌을 준다.
한편, 역설, 양언, 태극이라는 용어는 만물이 본디 하나임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그리고 대립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의 뿌리와 근원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해준다. 뿌리가 하나이므로 다시 보면 달리 볼 수 있다는 교훈을 얻는다.
실용적 관점에서 세상에 대한 이해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를 위한 현명한 선택이다. 선택은 바로 결정을 말한다. 결정은 컴퓨터와 비교하여 여전히 인간에게 남겨진 영역이고, 남겨질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많은 질서 잡힌 것들에 대한 결정은 컴퓨터에데 넘겨 주어도 좋다.
그러나 양언과 태극의 특성을 생각하면 세상(개념)은 끊임없이 분화할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이 계속하여 분화시켜 갈 것이다. 그리고 그 분화의 순간은 알고리즘이 포착하여 결정하기 어려운 휴리스틱의 영역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 휴리스틱의 능력과 방법은 인간의 손에 남겨질 필요가 있다.
인간이 결정하고, 결정의 결과에 책임을 부여해야만 한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면 인간은 억울한 감정으로 고통받을 것이다. 책임의 부여를 포기한다면 억울한 감정도 거세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결정으로 창조한다. 역설의 상황에서 인간은 결정을 통하여 다가오는 세상을 창조한다. 그 창조 앞에 서있는 경외와 두려움이 역설을 다루는 속성이다. 자신이 만드는 미래가 자신에게 유리할 것인지 불리한 것인지 명백하지 않은 상황에서 생겨나는 주저와 못마땅함이다.
못마땅하지만 경영자에게 다가오는 역설과 모순의 상황은 수도 없이 많다. 몇 가지의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조직 / 개인; 탑 다운 / 바톰 업; 경쟁 / 협업; 고객 / 구성원; 학습 / 성과; 지속 / 변화; 안정 / 유연; 사람 / 제도; 자유 / 정의; 마케팅 / 영업; 단기 성과 / 장기 성과; 도전 / 포기)
이 대립적인 문제와 여기 생겨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컴퓨터와 AI에게 묻기에는 아직 거리가 있어 보인다. 리더와 구성원, 즉 인간의 선택과 결정의 문제로 남아있다. 그리고 앞으로 오랜 시간 동안 이 문제는 인간의 결정의 영역, 인간이 창조해 가는 분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역설은 존재 양식이고 그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 DT로 넘길 수 없는 경영에서의 역설은 여전히 인간의 사고와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역설 상황이 어려운 것은 대립하는 상황에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 지 쉽게 평가하여 판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유리한 또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한다. 역설 상황에서 결정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본다.
1. 눈감고 결정한다.
복잡하여 판단을 내릴 수 없다면 그냥 선택하는 것이다. 생각을 하든 안하든 어느 것이 유리한 지가 드러나지 않는다면 이를 두고 굳이 고민할 필요없다. 그냥 눈감고 무턱대고 결정하는 것이다.
2. 둘중하나를 선택한다.
대립하는 두 개의 선택지가 보이는 경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가 더 옳다.'를 알 수 없거나 또는 더 옳은 것처럼 보인다면 그 것을 선택한다. 더 옳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어느 것이든 선택한다.
어떤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 것 외의 어떤 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역설이다. 그 것을 도전하면 된다. 포기를 선택한다면 그 순간 다른 것을 도전하고 있는 것이 된다.
3. 정보를 더 수집한다.
역설이 세상의 존재양식이라면, 존재의 본성이므로 역설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더라도 무작정 선택하는 것이 미흡하다고 생각하면, 정보를 더 수집할 필요가 있다. 자전거를 비틀 거리면서 타야 하듯이, 정보를 보다 많이 수집하다보면 평형이 깨진 어떤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중 유리한 것을 선택하면 된다.
4. 교묘한 결합을 창조한다.
학습과 일(성과)을 결합하여 액션 리서치가 탄생했다. 자유와 구속의 결합으로 계약결혼이 만들어진다. 짬짜면 같은 결합을 쉽게 대안으로 떠올릴 수 있다. 재택과 출근의 결합으로 스마트 오피스를 창조한다.
이 해법은 역설의 해법이라기 보다 딜레마의 해법에 더 가깝다. 그러나 역설이 딜레마를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파악한다면 역설 해법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5. 창발을 만들어낸다.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는 대화를 시도하고, 대화과정에서 새롭게 등장(창발)하는 무엇인가를 포착하여 결정의 대안으로 삼는 방법이다. 전략,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거나, 신상품 만들 때 적용하면 좋을 방법이다.
다양한 의견의 표출은 대화 참여자에 대한 지적 자극과 발언의 공포를 제거해 주는 퍼실리테이션으로 가능하며, 참여자 스스로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맥락에 노출시킴으로서 새로운 사고를 촉발할 수 있다.
6. 시차를 계획한다.
대립하는 가치 중 하나를 먼저 결정하여 시도하고, 다른 것을 나중에 시도하는 방법이다. 누군가에 대한 사랑은 그 외의 사람에 대한 비사랑을 내포한다. 일단 누군가를 먼저 사랑하고 나머지 사람을 다시 사랑하는 선택이 가능하다. 일단 공부하고, 나중에 일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한다.
컴퓨터가 많은 일을 대신해주고 있지만, 인간이 결정해야 할 것은 여전히 많다. 그리고 그 중 일부(이 글을 써 가면서 전부라는 생각으로 바뀌고 있다.)는 두 개의 요소가 서로 대립하여 어느 것이 옳다는 선택을 방해한다.
인간으로서의 숙명은 생명체라는 것이고, 생명체로서 생명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그 유지를 위한 중단없는 선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모순이거나 역설일지라도 어떤 선택이든 결정하고 그 것을 시도해야 생명이 유지된다. 그리고 그 결과 만족이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은 어떤 새로운 결정을 통하여 쉼없는 생성을 이루어내고 있다. 그 많은 것에서 역설이 생성의 원천으로 작동한다.
이 글은 아래 철학 세미나의 발표 자료를 재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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