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고 생각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포인트들
앞선 [05. 폭망해버린 첫 영국 석사 지원] 편을 보고 몇몇 분들이 SOP에 대한 질문을 하셨다. 드디어 팬이 생긴 기분이다. 감사함을 담아 내가 경험한 영국 석사 SOP에 대해 좀 더 자세히 풀어보고자 한다.
영국 대학원 첫 지원을 시원하게 조져버린 나. 연습삼아 해본 지원이였고, 어차피 어드미션을 받았어도 입학연기 신청을 했어야 했기 때문에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사무치는 빡침은 누를 길이 없었다. 애초에 떨어질 것이란 생각도 안 했거니와, 결정적으로 아내는 골드스미스로부터 어드미션을 받았기 때문이다.
방송작가를 하고 있는 아내는 업무 연차도, 졸업 학점도 나와 비슷했다. 업무 이력은 오히려 내가 더 낫다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에 당시 내 가장 큰 고민은 "나만 되고 아내는 떨어지면 어떡하지?" 였다. 돌이켜보니 너무 쪽팔린다. 빌어먹을ㅋㅋㅋㅋㅋ.
아내의 SOP가 훌륭했고 내 SOP는 형편없었던 이유
PD들은 소위 '글부심'이 있다. 높은 경쟁률의 논술-작문 시험을 운 좋게 통과한 경험 때문에 생긴 근거없는 자신감이다. 나는 특히 그 자신감이 심한 편이었다. 그랬기에 감히 나는 아내의 SOP를 첨삭하고, 내 것은 셀프로 첨삭했다. 두 SOP를 몇 번씩 번갈아 읽어봐도 내 것이 훨씬 더 나아보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내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어드미션을 받을 수 있었고, 나는 그 반대였다.
이러한 결과를 두고 유학원 대표, 이미 영국으로 석사를 다녀온 지인들, 자소서의 신이라 불리는 대학동기 등등 많은 전문가(?)들과 그 이유에 대해 고찰해본 바, 다음의 두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두 결론 모두 한정된 변수를 통해 도출한 매우 주관적인 것이라는 점을 미리 말씀드린다. (잘 가려 읽으시라는 소리...ㅎㅎㅎ)
1. 스토리가 중요하다. 하지만 얼마나 극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스토리가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나 역시 그것을 간과하고 SOP를 쓴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예나 지금이나 여기저기 나대기 좋아했던 성격 덕에 다이나믹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좋은 다양한 경험들도 많았다.
반면 아내는 비슷비슷한 프로그램을 꾸준히 만들어온 풍파없는 삶이었고. 그러나 두 SOP를 읽어본 모든 이들은 아내의 스토리가 훨씬 설득력있다고 평가했다. 심지어 스토리의 다이나믹함은 내 SOP 쪽이 압도적으로 좋았다고 모두가 인정했지만 말이다.
이 지점이 바로 소위 '자소설'이라고 불리던 K-자소서와 영국 대학원 SOP의 차이가 아닐까 한다. 매콤한 K-드라마에 익숙해진 탓인지 몰라도, K-자소서의 스토리텔링은 상당히 드라마틱하다. 짧은 분량 안에 내가 얼마나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인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이 일에 적합한지를 통일된 이야기 속에 모두 우겨넣어야 한다. 한때 신입사원 면접관이 되어 남들의 자소서를 읽어보기도 했지만 그때도 왠지 매콤한 자소서가 잘 쓴 것처럼 보였다. 흥미진진한 것이 읽는 맛이 있었으니까.
그 때문에 나는 SOP에 나의 모든 경험들 중 가장 매콤한 것들을 골라서 그것들을 유기적으로 엮어 "내가 얼마나 언론의 공정성과 공익성을 갈구하는 언론인인지"를 표현했다. 한편 아내는 특정 방송 프로그램을 만든 단 하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SOP를 채워나갔다. 왜 그 프로그램에 자원했고, 거기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담당 했으며, 자신의 역할의 한계는 무엇이었고, 그래서 이 석사과정에서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등이었다.
결과적으로 아내의 이야기는 굉장히 평면적이었지만, 그 덕에 하나의 메시지를 향해 명확하게 전진하고 있었다. 반면 나의 이야기는 굉장히 입체적이고 극적이었지만, 오히려 "무엇을 연구하고 싶다"는 메시지가 많이 가려지는 느낌이었다.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 '나'라는 캐릭터에 더 많이 집중한 탓이었다.
이를 통해 느낀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SOP는 본질적으로 '학업계획서'라는 것이다. 영국 교수들이 스토리텔링을 좋아할지언정, SOP를 통해 소설이나 영화의 극적인 재미를 얻고싶어하진 않아하는 것으로 보인다. 스토리텔링은 단지 "왜 이 공부를 하고 싶은가"를 설명하는 도구로서의 역할에 그쳐야 한다.
예능이나 드라마에서의 극적 구성에 얽매이면 오히려 '학업계획서'라는 본질을 추상적으로 만든다. 결국 남들보다 다이나믹한 경험을 하지 못했더라도 전혀 불리할 것이 없으며, 오히려 풍부한 경험을 한 사람이 이러한 함정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더욱 경계해야 한다.
2. 나에 대한 얘기만큼 '그 대학'의 취향도 중요하다.
1차 지원 후 대학들로부터 리젝을 당했을 때 이 빡침이 매우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겪어보는 이 감정이 왜 이리 익숙할까'했는데, 알고보니 학창시절 고백했다가 까였을 때의 딱 그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래. 따지고보면 이건 일종의 구애와 매우 비슷한 매커니즘이다. SOP와 구애 모두 '니 눈엔 내가 좀 모자라 보이겠지만, 이런 나라도 받아주겠니'의 설득과정인 것을 감안하면 소름돋는 싱크로율이다.
이것이 구애라고 생각했을 때 나의 가장 큰 패인은 '그녀의 취향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공들여 하나의 SOP를 완성한 이후 학교 이름만 달리해서 여러 대학에 지원했던 나는, 이를테면 똑같은 수법으로 여러 여성에게 동시다발적으로 들이댄 셈이다.
물론 누가봐도 잘난 놈은 지 꼴리는대로 들이대도 잘 먹힌다. 정우성 쯤 되는 잘난 놈이라면 개코원숭이 표정으로 고백한다 한들 실패할 리 없다. 학계에서는 출신학부, 졸업학점, 연구실적, 관련 업무 커리어가 모두 훌륭한 사람이 그 잘난 놈이다.
하지만 애매한 학교, 한심한 학점, 전무한 연구 실적에 그나마 업무 커리어가 내세울만한 장점인 나는 굉장히 전략적인 접근을 했어야 했다. 물론 나도 바보가 아닌지라 처음부터 이 장점을 전면에 내세운 SOP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표현함에 있어 학교마다의 취향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예컨대 '패션감각이 좋은 것'을 장점으로 내세워 들이댄다 하더라도 그녀가 댄디한 룩을 좋아하는 지, 화려한 룩을 좋아하는지 그 취향에 따라 표현방식이 아예 달라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학교에 있어서 취향은 '학풍'이다. 지원했던 LSE와 골드스미스의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부를 예로 들어보자면, LSE(런던정경대)는 다소 보수적이고 골드스미스는 매우 진보적이다. 그리고 LSE가 매우 아카데믹하고 이론중심적이라면 골드스미스는 굉장히 실무적인 성향이 강하다. 이 성향에 따라서 나는 나의 유일한 장점인 '커리어'를 표현하는 방식을 달리했어야 했다. 1차 SOP를 돌이켜 읽어보니 나는 LSE와 골드스미스 어느 누구도 좋아할만한 지원자가 아니었다.
나아가 취향 뿐만 아니라 그녀가 요즘 꽂혀있는 관심사도 중요체크 포인트다. 학교로 치면 그 학부의 메인 교수진들의 연구분야가 되겠다. 혹시 여력이 된다면 어떤 교수를 학교에서 가장 밀어주는지를 파악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이 그 학교의 주요 관심 분야일 확률이 높고, SOP에 그것을 언급하며 들어가면 아무래도 라뽀가 쉽게 형성될 것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커리어가 화려해도 해당 학교가 관심을 갖지 않는 주제를 들먹이면 떨어질 수도 있다. 대학원은 보습학원이 아니기 때문에 내 관심 연구주제를 이끌어줄만한 교수나 커리큘럼이 없으면 뽑아주고 싶어도 뽑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특정 교수를 언급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조금 민망한 비유지만 기왕 짝짓기에 빗댔으니 얘기하자면, 교수의 이름을 특정하는 건 마치 '성감대'를 건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서로 충분한 교감이 이루어진 후에 이루어지는 스킨십은 사랑의 완성을 이끌지만, 성급한 스킨십이 불러오는 건 파국 뿐이다. 효과도 확실하지만 그만큼 부작용도 크다.
어설프게 교수 이름과 연구주제를 들먹이는 건 그 교수는 물론 그 어떤 교수들로부터도 외면당하겠지만, 만에 하나 그 교수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그만한 결정타도 없다.
돌이켜보면 SOP 속 아내의 커리아와 연구목표는 골드스미스의 학풍과 관심사에 부합하는 것이었고, 반면 나는 것은 어느 학교가 보기에도 몹시 애매하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결국 아내는 간택받았고,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시즌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절치부심 두 번째 시즌을 기다리다
어차피 매년 다른 사람이 하는 평가에 정답이 어디있겠냐만은, 이처럼 여러 사람들과 나름 납득할만한 분석을 마치고 나니 나의 첫 SOP가 더욱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드디어 겸손이라는 것이 장착되며 동시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러다 다 떨어지면 어떡하지?'
다음 글을 통해 물러설 곳이 없던 자의 절박했던 2번째 SOP를 일부 공개하며 어떻게 LSE로부터 어드미션을 받을 수 있었는지 써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