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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망친 곳의 낙원 May 01. 2022

04. 학점이라는 원죄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

석사를 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양하다. 박사를 목표로 이른 나이에 석사를 하는 이들도 있고, 직장을 다니다가 학문적 커리어를 보강하기 위해 석사를 따는 사람들도 있다. 후자는 보통 MBA나 LLM같은 경영, 법학 전문대학원으로 진학하는 케이스가 일반적이다. 이번 글에서는 전자에도 후자에도 속하지 않는 나의 처참했던 첫 영국대학원 지원기를 다뤄볼 적어볼 예정이다. 부디 이 글을 읽고 내 뒤따르는 이들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한 번에 원하는 어드미션을 받으시길 바란다.


그래서 너의 목적은 무엇이냐

일전에도 얘기했듯 난 지쳐있었고 쉬고 싶었다. 대학원에 지원한 건, 그냥 쉬기엔 너무 시간 아깝다고 생각해 오랜 꿈이었던 "해외 명문대에서 공부해보기"를 늦은 나이에 실현해보고자 했던, 정말 얼토당토 안 한 이유다. 물론 지금은 여러 교수님들과 전문가들의 도움을 통해 매력적인 연구 주제들을 탐색하고 있지만 첫 지원 당시엔 연구 주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학교는 영어권으로 가고 싶었고, 기왕이면 해외 최고의 명문대에서 한 번 공부해보고 싶었다. 신문방송학부를 졸업하고 PD로 10년을 살았기에 전공은 미디어가 좋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굳이 목표가 있다면, 이런 나의 모습...?
미국을 배제한 이유

모두가 1순위 유학지로 미국을 꼽는다. 하버드, 스탠퍼드, 예일 등 누구나 알만한 명문 대학이 대부분 미국에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미국을 최우선에 두고 검토했지만 미국 유학에 필요한 서류들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토플은 둘째치고 웬만한 명문대는 GRE라는 별도의 시험점수를 요구했다. GRE에 대해 알아보니 아무리 봐도 회사를 다니면서 준비할만한 시험이 아니었다. 머리도 예전만큼 팽팽 돌지 않는데다, 특히 나의 일은 밥먹듯 밤 새는 방송일이었다. 게다가 석사 과정도 2년이다. 쉬고싶긴 했지만 2년이나 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만한 돈도 없었고. 그런 내게 가장 매력적인 대안을 제시한 나라가 영국이었다.


명예영국인이 되어버렸!

우선 영국의 대학들은 GRE를 요구하지 않는다. 단지 학업계획서와 이력서로 평가하고 추가로 학업증명서와 영어성적을 제출하기만 하면 됐다. 그마저도 영어성적은 입학하기 전까지만 제출하면 되는 관대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 영국은 1년 만에 석사를 딸 수 있다. 방학도 없는 강행군이긴 하지만 그래도 석사학위를 1년 만에 얻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메리트다. 어느새 워터를 오터로, 베럴을 베터로 발음하는 명예영국인이 되어버린 나. 그래, 세계 초일류 대학 옥스퍼드, 캠브리지 품은 영국으로 가자!

...뭐지 저 븅신은?


유학원 방문, 부푼 희망에 현실감각을 잃다

 길로 유학원을 찾은 . 자초지종을 들은 유학원 관계자는 영국을 고른  탁월한 선택이라며 나의 노고를 치하했다. 특히 영국의 대학들은  같은 업계 경력자를 훨씬 선호한다며 나를 북돋았다. 더욱 기분이 좋아진 . "제가 말이죠, 10  이러저러한 프로그램을 연출했고,    개는 이러저러한 상도 받았는데..어쩌구저쩌구..."라며 묻지도 않은 정보들을 쏟아냈다. 이에 유학원 관계자는 연신 따봉을 날려댔고, 그 정도 경력이면 결격이 될만한 대학이 없을 것이라 했다. 으쓱해진 나는 "옥스포드나 캠브릿지를 가고 싶은데 미디어 관련 전공이 있나요?"라고 묻는다. 하지만 아쉽게도  학교 모두 미디어 관련 전공은 없었다. (전공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는 불과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럼 미디어로 유명한 대학이 어디냐는 질문에 그는 런던 정경대와 골드스미스 대학을 추천했다. 런던정경대라..예전에 라디오스타에서 런던정경대를 졸업한 한 연예인을 엄친딸로 소개하며 너스레를 떨던 것을 본 기억이 났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해보니 노벨상 수상자도 18명이나 배출했고 이런저런 나라의 대통령도 많이 배출한 명문대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옥스포드와 캠브릿지가 아닌 것이 못내 언짢았던 나, "그럼 뭐 아.쉬.운.대.로 런던정경대로 지원해볼까요?"라는 망발을 내뱉는다. 아직 사정을 잘 모르는 가련한 유학원 관계자, 마치 자신의 일인냥 진심으로 아쉬워 해준다. 그리곤 본격적인 서류를 준비하며 묻어오길,


"근데 학점이 어떻게 되시나요?"


10년 전의 업보, 드디어 현실을 마주하다

"졸업학점은 3.4입니다!" 이 한 마디가 공중에 떠있던 날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급속도로 안색이 어두워진 유학원 관계자, 급히 런던정경대 입학 가이드를 뒤적인다. 혹시 4.3점 만점에 3.4점이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 나는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4.5점 만점입니다만.." 유학원 관계자는 아예 흙빛이 되어버린 안색으로, 내 졸업학점이 런던정경대가 규정하는 최소한의 요구학점인 3.5점에 미치지 못한다고 얘기했다. 애초에 최소 요구학점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나.


"그럼 옥스포드랑 캠브릿지의 최소 요구학점은 몇 점인가요?"


유학원 관계자는 말없이 자신의 테블릿PC를 내게 들이밀었다. 4.5점 만점에 4.2점, 그것이 그들이 요구하는 '최소한'이었다. 10년 전, 공부 안 하고 띵까띵까 쳐놀던 업보를 이제서야 마주한다.

그럼 아쉬운대로 런던정경대에 지원해볼까요?????????


급격히 돌아온 현실감각, 그리고 기적처럼 생겨난 실낱같은 희망

영국의 대학은 학점표기를 특이하게 한다. First Class, Upper Second, Lower Second...이런 식으로 굵직굵직한 밴드로 학점을 묶어버린다. 한국 학점으로 완벽하게 환산할 수는 없지만 First Class가 대충 4.2점 이상, Upper Second가 대충 3.6~3.8점 이상, Lower Second가 대충 3.2점 이상 정도 된다. (4.5점 만점 기준).


런던정경대, 골드스미스 대학 등 대부분의 명문대는 Upper Second를 최소한의 기준으로 삼고 있고 옥스포드와 캠브릿지 등 일류대학은 First Class의 학점을 요구한다. '정녕 이대로 해외 명문대에서 공부하는 꿈은 접어야 하나? 남은 방법이라곤 노벨상이라도 따서 80의 나이에 명예박사 정도 하는 것이 유일한가?' 실의에 빠져있던 나, 내 성적표 밑에 붙어있는 또 다른 점수를 발견한다.

3.40 / 4.50 아래에 있는Converted GPA. 바로 100분위 환산 스케일 되시겠다!

백점 환산점수라고도 하고 백분위 점수라고도 하는데 이게 좀 웃긴게 학교마다 산출기준이 조금씩 다르다. 어떤 지원자는 그래서 GPA 점수(4.5 만점)를 표기해야 더 유리할 때가 있고, 또 다른 지원자는 백분위 점수를 적어야 더 유리할 때도 있다. 지원을 받는 입장에선 기실 뭘로 적든 그다지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봐야 미미한 차이일 것이므로. 하지만 나에겐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바로 아래 규정 때문이다.

런던 정경대의 한국 지원자 입학허가 기준. B+ 또는 백분위 85점 이상을 요구한다.

런던 정경대는 한국 지원자들에게 백분위 85점 이상이거나 GPA 기준 B+(3.50/4.50) 이상이기를 요구한다. 그러니까 나는 GPA 기준으로는 자격 미달이지만 백분위 점수로는 가까스로 지원 자격을 획득하는 상황이 된다. 물론 단지 지원자격이 생길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기쁨이었다. 가능성 0%와 가능성 1%는 아예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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