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은 화수분

by 이상역

오늘은 고향에서 한가위를 풍성하게 맞이했다. 한가위를 맞아 가족에 대한 따뜻한 정과 둥지의 포근함에 세월의 시름을 잠시 잊고 지냈다.


고향의 밤하늘엔 여전히 둥근달이 앞산을 거슬러 떠오르고, 타관 땅을 떠돌던 구름도 산기슭에 걸쳐 앉아 가는 세월을 노래한다.


세월의 진득한 무게를 견디지 못해 비스듬히 누운 시냇가의 느티나무와 어릴 적 새끼손가락 굵기의 나무둥치는 어느새 내 허리보다 불어나 오고 가는 길손을 맞이한다.


선산에 누워계신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산소를 찾아가 성묘를 하자 이마엔 성근 땀방울이 솟아난다. 그 땀방울에 연민의 정이 스며들면서 가슴에 그리움의 빗방울을 산란시킨다.


세상의 바람과 대지를 가르며 연어처럼 달려온 고향! 지구를 향해 자식을 떨구는 밤나무처럼 고향은 고독한 그리움의 안식처다. 산에서 불어오는 거친 바람은 사람을 향해 마구 달려들고 바람에 휩쓸려 가는 구름은 속절없이 산등성을 넘어간다.


어머니가 보고 싶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립고, 유년의 성장 바람이 그리워 찾아온 고향. 고향의 들녘에만 서면 거칠 것 없던 지난 시절의 욕망과 꿈이 여기저기서 묻어난다.


아늑하게 바라볼 고향이 있어 좋다지만 반대로 고독과 외로움도 끝없이 안겨주는 곳이 고향이다. 무언가에 기대면 기댈수록 의타심이 늘어나듯이 고향이란 언덕에 마음을 기댈수록 태어난 근원에 의문만 더해간다.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마음을 일렁이게 하듯이 고향의 들녘은 상념이란 바다에 폭 빠져들게 한다. 오랜만에 바라보는 북극성과 북두칠성. 이렇게 고요한 밤에 고향의 밤하늘을 무념무상으로 바라본 적이 언제였던가.


마음은 세월의 강을 좁히기 위해 아등바등거리고 여유와 낭만은 마음에서 떠난 지 오래다. 예나 지금이나 마을의 중심을 가로질러가는 얕은 여울은 어딘가를 향해 흘러만 가고, 골짜기와 골짜기를 잇는 계곡에는 소나무와 참나무와 밤나무가 꼿꼿하게 서 있다.


마을 고샅에서 부질없이 짖어대는 멍멍이 소리와 바람을 타고 뒤풀이하는 풀숲의 수런거림이 고요를 풀무질해 댄다. 하늘에 묵직한 울림을 남기며 산자락을 넘어가는 비행기. 가는 세월을 원망하는 어머니의 애절한 목소리가 바람에 뒤섞여 골목길을 서성인다.


아! 내 고향은 이런 곳이던가. 타관 땅에서 받은 설움과 고달픔을 위로받고자 찾아왔지만, 고향은 나를 배척하려고만 한다. 고향에 와서 산천을 누비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옛것의 그리움은 하나둘 사라져 가고 가슴에는 허망함만 들어찬다. 고향에는 낯선 풍경이 늘어나고 구부정한 나무와 풀숲의 무성함만 번성하다.


고향집의 봉창을 열어젖히면 쏴-아 하고 밀려오는 하늬바람과 떼를 지어 날아가던 기러기의 날갯짓이 그립기만 하다. 마을의 고샅에선 낯익은 얼굴이 하나둘 튀어나와 유년의 모습을 달래고 불러낸다.


구름에 가렸던 햇빛이 밝게 얼굴을 드러내고 고향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마음의 시름은 허공으로 훨훨 날아간다. 가을이 가을다운 것은 풍성함이고, 고향이 고향다운 것은 오래된 향수와 같은 묵직한 냄새다.


고향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낯선 것조차 익숙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푸근함이 고향을 자주 찾아오게 한다. 내 고향의 구석구석엔 그리움이 화수분처럼 자란다.


고샅길에 들어서면 반가운 얼굴이 튀어나올 것만 같고, 마을 입구 모퉁이를 바라보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황량한 도시에서 찌든 삶의 무게도 고향 땅을 밟고 나면 하나둘씩 가벼워진다. 마음에 번잡하고 괴로웠던 생각도 고향의 진한 향수를 마시고 나면 맑게 정화된다.


이런 맛에 고향을 좋아하고 의지하고 찾게 되는 것 같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가도 나의 그리움은 고향인 충청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고향의 시답잖은 모습도 사랑스럽게 바라보이는 화수분 같은 곳. 그저 내 삶이 다하는 날까지 어기적어기적 찾아와야 한다. 오늘은 모처럼 고향에 대한 진한 향수의 노래나 목마르게 불러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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