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내린 뒤 떨어진 밤톨이 빤짝거리고
축축한 새벽 숲 속에는 이슬 아니 말랐네
아이를 불러일으켜 묵은 불씨 헤쳐보니
옥 껍질 다 타고난 뒤 튀어나온 황금 구슬(이인로, ‘밤을 줍다’)
이 시를 지은 이인로는 고려 명종 때 학자다. 그가 지은 파한집은 학창 시절 보한집과 역옹패설과 함께 고려 시대 3대 수필집으로 유명했다.
이인로가 고려 시대 문인으로 어떠한 삶을 살다 갔는지 아는 것은 없다. 이인로가 지은 한시의 여백에는 詩人의 능동적인 행동은 없고 수동적인 자세만 엿보인다.
서리 내린 뒤 떨어진 밤을 옷깃을 적셔가며 주어온 것도 하인이고, 주워온 밤을 아궁이 넣어 굽고 꺼낸 것도 하인이다. 이인로는 하인의 움직임과 밤나무에서 떨어진 밤과 구운 밤을 바라보며 시조를 읊조렸다.
이인로는 체험이 아닌 관조적으로 바라본 느낌과 감정을 한시로 표현했다. 시인의 창작행위를 비평하자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라면 어느 정도 체험도 해보며 시구를 짓고 노래하는 것이 참된 문인의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사실 몸으로 체험하지 않고 자연을 관조하고 하인의 행동을 바라보며 시조로 읊조리는 것도 아무나 하지 못한다. 시구의 내용은 이러저러해도 시조를 읊조리는 것은, 어쩌면 그 시대에는 우월적인 행위가 아니었을까.
나는 이인로처럼 밤을 줍는 행위를 옆에서 바라만 보지 않고 직접 주웠다. 고향에는 젊은 사람이 없어 밤을 주워가는 사람이 없다.
밤이 떨어질 만한 나무를 찾아가면 땅바닥에 밤이 수두룩하다. 바닥에 떨어진 밤을 정신없이 줍다 보면 가져간 비닐봉지에 순식간에 밤이 가득 찬다. 밤알도 이전보다 커서 조금만 주워도 비닐봉지에 더 담을 수 없다.
산자락에 올라가 줍는 밤에는 3가지 맛이 깃들어 있다. 그 맛을 제대로 알면 밤을 즐겁게 줍고 맛있게 먹는다.
밤은 나무에 달린 밤을 바라보는 맛과 떨어진 것을 줍는 맛과 주운 밤을 쪄서 먹는 맛이 서로 다르다. 밤송이에 매달린 밤을 바라보면 계절의 맛이 나고, 떨어진 밤을 주우면 풍성한 맛이 난다.
그리고 주워온 밤을 찌거나 구워 먹으면 구수한 맛이 난다. 이렇게 밤의 3가지 맛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밤나무 밑에 떨어진 밤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간다.
고향에서 주워 온 밤을 벌써 몇 번째 쪄 먹었다. 껍질이 싱싱하던 밤도 찌고 나면 시들해진다. 밤을 찌면 찐 밤에서 구수한 맛이 난다.
찐 밤도 껍질과 속껍질을 벗겨내는 일은 귀찮고 막상 겉껍질과 속껍질이 제거되면 밤 알맹이는 작고 초라하다.
누군가는 밤 껍데기를 벗기는 것이 귀찮아 밤을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반대다. 무언가를 먹으려면 기다림이 필요하다.
밤 껍데기를 까는 것은 참고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을 가르쳐 준다. 어쩌면 내가 살아온 삶과 닮은듯해서 밤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밤의 겉껍질을 벗기는 작업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음식을 먹으려면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듯이 알밤을 먹으려면 정성과 시간이란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알밤에 인생의 참된 의미까지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밤의 겉모양은 화려하지만, 막상 껍질을 벗겨내면 꺼칠꺼칠한 속살이 드러난다.
밤은 부드러운 속살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워 어쩌면 두툼한 겉껍질과 까칠까칠한 것을 몸에 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밤을 주우러 갈 때는 주로 새벽에 간다. 전날 밤에 알밤을 떨구어 주는 것은 밤나무가 아니라 바람이다. 밤을 주울 때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짓게 하는 것은 발 옆으로 밤알이 툭툭 떨어질 때다.
나는 알밤이 떨어질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밤이 툭툭 나뭇가지를 때리며 떨어지면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밤나무에서 밤이 후드득 떨어지면 머리에 맞을 것 같아 몸은 움츠리지만, 얼굴에선 엷은 미소를 짓는다. .
감나무에 매달린 홍시는 종일을 기다려도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밤송이에 들어있는 알밤은 종일이 아닌 한 시진만 기다려도 떨어진다.
밤나무 밑에서 옷을 벗은 알밤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듯이 삶에도 항상 작은 행운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살고 싶다.
그것이 비록 밤톨처럼 작은 것일지라도 그것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지난밤에 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진 알밤을 주우러 홀로 산자락을 찾아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