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보석상자는 무엇일까. 가슴속 깊이 간직한 보석상자를 꺼내어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아침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 행세하며 살아가는 것에 그럭저럭 만족한다. 밝은 세상을 바라보는 두 눈과 건강하게 걸을 수 있는 두 다리와 마음껏 세상을 휘두를 수 있는 두 팔을 소유한 것보다 더한 축복이 있을까.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주변에서 보살펴주는 따스한 정과 소소 함이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창조하거나 홀로 독불장군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 사람은 자연과 사회에 기대어 생을 누리는 연약한 존재다.
오늘은 아침부터 빌딩 숲에서 우는 까치 소리가 요란하다. 누군가를 깨우기 위한 소리는 아니지만 마치 옛날에 익숙하게 듣던 팝송처럼 귀에 익은 소리로 들려온다. 경쾌한 클래식 음악이 건물과 나뭇잎 사이로 흐르고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수런거리는 아침이다.
건물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한 계단 한 계단 발걸음을 내딛는다. 대리석 계단을 지나 콘크리트 건물에 들어서면 어느새 반복된 일상에 합류한다.
건물 주변에 잔잔한 음악이 흐르면 계절의 의미가 명료해지고 머릿속은 맑아진다. 사물에도 유정의 의미가 깃들어있듯이, 출근길에 마주하는 모든 것에도 유정이 깃들어있다.
가로수 나뭇잎이 서서히 퇴색하는 것을 바라보니 가을 숲에 들어가서 호젓하게 숲길을 거닐어 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가을의 숲은 바라보기만 해도 사람을 유혹하는 그윽한 정경이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고 나뭇잎 사이로 음악이 흐르면 가슴속에서 방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솟아난다. 매일 만나는 풍경인데도 만날 때마다 종일토록 배회하고 싶은 유혹에 빠져든다.
가을은 참 좋다.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고 고독을 곱씹어 볼 수 있는 사색의 시간을 제공해서다. 저 멀리서 가로수 사이로 가을이 아장아장 걸어오는 것이 보일 듯 말 듯 아롱거린다.
세상에 태어나 이것저것 겪으며 살다 보니 어느덧 세상과 적당하게 타협할 줄 아는 나이가 되어간다. 유년 시절엔 먹을 것이 가득 찬 보석상자를 그리고, 젊은 시절엔 멋진 여인과 초가삼간 집을 짓고 사는 보석상자가 그리웠다.
나이가 들자 지금은 태어나서 맺은 인연의 허물을 하나하나 벗어내고 초심으로 돌아가는 근원에 대한 보석상자가 그립다.
사람도 따지고 보면 자연의 한 부분이다. 그 부분이 전부로 돌아가는 것은 순리이자 법칙이다. 가을날 아침에 문득 근원에 대한 보석상자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가을에는 익어 가는 모든 것이 아름답듯이 삶의 주변에 형성된 풍경이 영롱하게 다가온다. 근원을 알지 못하는 곳에서 불어온 바람이 가슴에 뜨거운 것을 남기고 훌쩍 사라져 버린 가을날.
낙엽이란 퇴색이 더해지니 마음자리에 가을이 무럭무럭 영글어간다. 하루를 무심하게 보내는 일상이 소중하기만 하다. 하루가 다 같아 보여도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다.
그리고 내일은 오늘과 다른 내일이다. 서로 다른 일상에 부대끼는 존재가 끼어들어 세월의 흐름을 따라 하루하루 묻어가는 신세다.
건물과 나뭇잎과 사람이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생산해 내는 아침이다. 이제는 계절의 힘을 빌려 떠내려온 것을 하나하나 추슬러 내일을 준비해야 할 때다.
사무실 옆에 차를 주차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두둥실 떠 있다. 가을이 가을다운 것은 높고 광활한 하늘과 끝없이 수를 놓는 구름의 연출이다.
일출과 일몰의 화려함처럼 가을은 온갖 사물을 불태워 아름답게 가꾸고 꾸미는 계절이다. 내 인생에서 잠시 머무르는 정거장 같은 직장이지만 바쁜 걸음을 잠시 멈추고 비워가는 나뭇잎의 연출과 밑바닥부터 채워가는 마음의 호사를 누려본다.
무미건조한 건물로 들어서자 잠시 출근하면서 누렸던 마음의 사치가 사라진다. 넓은 곳에서 사방이 꽉 막힌 건물로 들어오자 방황하던 마음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나뭇잎의 고향이 대지이듯이 마음의 고향은 몸이란 그릇이다.
아침에 출근하던 바쁜 마음이 자리를 찾아가자 새로운 상념의 바람이 불어온다. 무서리를 오롯이 받아내는 들녘의 노란 국화꽃처럼 가을에는 멋진 향기를 피우는 국화꽃이 되고 싶다. 더해서 사람 냄새를 솔솔 피우며 추하지 않게 살아가고 싶다.
가을바람이 훑고 간 자리엔 봄과 여름의 치열하고 분주했던 삶의 흔적이 이리저리 흩날린다. 그렇게 흩날리는 삶에도 현재라는 시간은 여전히 자리를 틀고 앉아 어딘가로 흘러만 간다.
하루를 바쁜 듯이 살아가지만 돌아보면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떠한 삶이 되었든 지나간 자리에 추레한 것이 남지 않기 바랄 뿐이다.
가을에 물들어가는 단풍처럼 내일도 온화하게 물들이며 휘적휘적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찬 기운이 솔솔 불어오는 가을날 아침. 계절의 바람도 서서히 시간을 따라 매섭게 여물어간다.
내가 간절하게 원하는 보석상자는 내일도 오늘과 같이 평온하게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런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오늘이란 돛대를 튼실하게 세워 미지의 세계를 향해 천천히 일상의 노를 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