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시인

by 이상역

언제였던가.

내가 살던 마을에

가을이 찾아와서


길가에 즐비하던

플라타너스 이파리는

퇴색되어 가고


詩 한 편을 쓰기 위해

왼 종일

거리를 쏘다니던 때가


가을에 나는

눈물 나게 그리운

詩 한 편을 쓰고 싶었다.


가을에 나는

눈물 나게 그리운

사랑을 하고 싶었다.


지금, 나는

詩 한편에

목숨 같은 사랑을 하고 있다(유인숙, 「가을, 시 그리고 사랑」).


가을과 詩를 사랑한 시인의 시구를 읽으면 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과 詩를 향한 뜨거운 열정이 느껴진다. 이렇게 詩만 쓰기 위해 한평생을 미친 듯이 사랑하다 죽을 수는 없는 것일까?


얼마나 고고하고 멋진 삶인가. 자신의 외로운 일에 빠져 세상 사람에게 이리저리 밟히지도 않고, 삶이란 힘겨운 더부살이에 버거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롯이 詩를 쓰기 위해 순수한 열정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부럽기만 하다. 詩 하나에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것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 그 길은 詩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구원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시인이 詩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해서다. 그 사랑을 詩라는 대상에 고스란히 녹여내기 위해 창작에 따른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 반쯤은 미치도록 정성과 마음을 다해야 일정한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나도 그런 입신의 경지는 아니더라도 이 가을이 가기 전에 소중하게 여기는 것 하나라도 찾아서 미쳐보고 싶다.


비록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나의 열정과 온 마음을 다해 그 대상에 빠져보고 싶은 짙은 열망을 꿈꾸어 본다. 시인은 詩를 짓기 위해 긴긴밤을 꼬박 새우고 끙끙 앓아가며 시구를 엮는다.


황금빛이 가득한 들녘에 핀 한 송이 국화꽃도 시련과 고통과 인내 속에서 열매를 맺듯이 詩도 하나의 작품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는다.


자기만의 글 세계를 갖춘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아름답게 표현할 줄 아는 것은 자기를 완성하는 길이다. 자기를 완성한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이 저절로 배어 나온다.


가을은 사람을 시인으로 만드는 계절이다. 길 위에 떨어진 색 바랜 낙엽과 노랗고 빨갛게 익어가는 색색의 나뭇잎을 바라보는 마음만으로도 자연의 詩는 완성된다.


그래서 가을에는 시인이 많이 탄생하나 보다. 살아가는 날을 노래할 줄도 알고, 삶을 여유롭게 즐기는 사람은 진정으로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사람이다.


가을에는 어깨에 바랑을 둘러메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릴케의 시집 한 권을 손에 바투 쥐고 산이나 강을 찾아가서 큰 소리로 詩를 읽어가며 가을을 노래하고 싶다.


그리고 해질 무렵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허름한 선술집에 들어가 한 잔의 술을 기울이며 詩를 사랑하는 사람과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가을도 시절 인연이 다하자 소리 없이 사라져 간다. 나뭇잎을 털어낸 쓸쓸한 나뭇가지에서 만추의 모습과 머지않아 겨울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나만이 유독 가을이 되면 진한 고독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가을은 내가 사랑한 가장 아름다운 연인이다.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진한 사랑에 대한 멋진 詩나 한번 써보고 싶다.

이전 12화가을에 띄우는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