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초가 무성한 오솔길을 따라 호젓하게 걸어본 지도 오래다. 청초는 무한 세상을 떠돌다 낯선 땅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한평생을 살아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이리저리 부평초처럼 떠돌다 우연히 한 곳에 생명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청초나 사람이나 정착해서 살아가는 것은 같지만 삶의 배경과 맞서 싸우는 대상만 다를 뿐이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 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청초 우거진 골에', 임제)
옛시조를 읽으면 선인의 풍류와 멋스러운 기개가 부럽다. 신분제도가 철저한 사회에서 양반이 관복을 입고 기생의 무덤에서 제문을 지어 추모했으니 봉고파직은 당연한 결과다.
임제는 자신이 행한 결과를 예측하고 황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인생의 허무함과 쓸쓸함을 노래했다.
푸른 풀이 우거진 골짜기에서 자고 있는가 누웠는가. 젊고 아름다운 모습은 어디에 두고 백골만 묻혔는가. 잔을 잡았으나 권할 사람이 없으니 그것이 슬프구나.
요즈음 풍류와 멋을 즐기며 사는 사람은 드물다. 조선 시대나 지금이나 삶의 기반이 달라진 것은 별로 없는데 마음이 옹색하고 각박해져 간다.
임제는 부임지로 가다 황진이를 만나려고 했으나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아름답고 노래 잘하고 시 잘 짓고 거문고 잘 타던 황진이는 만날 수 없고 그녀가 묻힌 무덤에는 청초만 무성하게 자랐다.
청초는 싱싱하고 푸릇푸릇하게 성장하는 풀이다. 청초는 다른 말로 잡초라고 하는데 여름철 소나기를 맞으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란다.
태풍 ‘하이난’이 비를 흩뿌리며 지나갔다. 비가 온 뒤 청초가 무성해진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모처럼 위례신도시 휴먼링을 따라 한 바퀴 거닐었다.
휴먼링에는 나무와 꽃을 심어 놓아 정갈하고 나무와 꽃 사이에 청초가 무성하게 자라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나무와 꽃 사이에서 어우렁더우렁 사는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나무는 나무대로 꽃은 꽃대로 청초는 청초대로 터를 잡고 살아간다.
나무와 꽃은 사람이 심은 것이지만, 청초는 먼 곳에서 날아와 자리를 잡은 것이다. 휴먼링에서 청초를 보며 느끼는 것은 인생의 허무함이나 쓸쓸함이 아닌 도시의 번성함과 성장이다.
청초도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 자라는 가에 따라 느낌과 생각이 달라진다. 조선 시대 산골짜기에서 자라는 청초는 인생의 쓸쓸함과 무상함을 느낄 것이고, 오늘날 도시에서 자라는 청초는 삶의 번성함과 번잡함이다.
다음 주는 풍성한 한가위다. 올해는 태풍과 코로나로 한가위를 무사히 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조상의 묘는 벌초해야 한다. 한가위 맞이하기 전 산소의 무성한 청초를 깎기 위해 사람들로 북적일 것이다.
오솔길 옆 청초는 뿌리를 보고 외롭게 살아가지만, 도시에 뿌리내린 사람은 자신의 밑뿌리와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울려 살아간다.
조선 시대 임제는 ‘청초 우거진 골에’라는 시조를 남기며 인생의 쓸쓸함과 허무함을 노래했다. 청초 우거진 길을 걸어가는 나는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사람은 어느 시대 어느 자리에서 있느냐에 따라 생각과 감정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인가 보다. 그런 삶에서 가끔은 청초가 우거진 길을 거닐며 가는 세월을 노래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