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에는 퀸스타운 시내로 나가 아로마 식당에서 양고기를 먹었다. 처음 먹는 양고기라 특별할 맛이 있을 줄 알았는데 소고기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오자 일행은 속이 출출하다며 이구동성으로 시내에 나가 술 한 잔 더하잔다. 그렇게 해서 마음이 동한 대여섯이 어울려 호텔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다시 나갔다.
이곳은 교통 시스템이 잘 연계되어 있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표를 이용하면 시내버스가 호텔까지 들어와 시내까지 무료로 태워다 준다. 일행과 버스를 타고 퀸스타운 시내에 가서 한국인 교포가 운영하는 ‘아리랑’ 식당을 찾아갔다.
일행과 식당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얼마 후 식당 주인이 영업이 끝났다며 우리만 남겨 두고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내보냈다. 아마도 식당에 들어오면서 일행 중 누군가가 주인에게 노래방을 이용할 수 있느냐고 물었던 것 같다.
식당 주인이 셔터를 내리자 식당이 노래방으로 변신했다. ‘아리랑’ 식당이 ‘아리랑 노래방’으로 변하자 일행은 일어나서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오늘은 퀸스타운에서 크라이스처치로 가는 여정이다. 이곳에 와서 며칠간 바라본 호수와 산과 초원. 뉴질랜드 자연은 바라보면 볼수록 우리나라와 많은 차이가 난다. 버스가 지나가는 길가에는 싸리꽃 비슷한 꽃이 우리를 안내한다.
사랑하는 연인과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듯이 만리타국에 와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새로운 인연을 맺었고 만남이 더해갈수록 친밀도가 높아간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보이 지를 않는다. 이곳 날씨는 가이드가 말했듯이 변화무쌍하다. 하루 중에도 언제 비나 눈이 내릴지 몰라 뉴질랜드 날씨를 여성의 마음에 비유한다.
여성을 우대하고 존중하는 나라. 여성을 먼저 생각하는 나라. 부부가 헤어져도 여성에게 양육수당을 지급해서 자식을 부양하는 시스템. 선진국의 조건은 모성과 사회적 약자를 철저히 보호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다.
뉴질랜드에서 사회적 보호 대상 순위는 어린이, 사회적 약자, 여자, 반려동물 그리고 맨 마지막이 남자다. 남자는 반려동물만도 못한 대우와 보호를 받는 곳이 뉴질랜드다.
오늘은 초원 대신 포도밭으로 변한 들녘을 가로질러 가고 있다. ‘와인’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장려해서 프랑스와 대등한 수준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단다.
강물이 유장하게 계곡을 굽이치며 어딘가로 흘러간다. 그 강물을 경계로 버스가 가는 곳과 길 건너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어제 퀸스타운에서 밀포드사운드로 갈 때와 같이 버스가 가는 곳과 강 건너편이 차이가 난다.
강 건너편은 민둥산이고 버스가 지나가는 곳은 나무가 무성하다. 어제저녁 일행과 술을 마셔서 그런지 몸의 움직임이 늘어져만 간다.
술과 여행은 정반대의 개념이 아닐까. 술은 몸에 게으름의 싹을 길러주고, 여행은 몸에 활력과 새로움을 부여한다. 낮과 밤의 차이처럼 술은 밤에 익숙하고 여행은 낮에 익숙하다.
09:53분. 가이드가 한 시간의 자유를 주었다. 버스에서 내려 움직이는 자유가 아닌 버스 안에서 음악이나 마음껏 청취하라는 자유다.
지나간 팝송을 틀어주고 지난 시절을 떠올려보라는 여유로운 시간을 주었다. 뉴질랜드 들녘에서 가장 어울리는 여행의 조미료는 감미롭고 유려한 음악이다.
버스를 타고 떠도는 여행에서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 노래다. 노래는 사람의 영혼을 맑게 해주는 전해질이고 아름다운 목소리는 마음의 심금을 울려주는 양념이다.
버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데 사방을 아무리 바라봐도 농가 한 채 만날 수 없다. 태양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산은 옷을 벗고 누워 속살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팝송의 리듬에 맞추어 고독하게 길을 질주해가는 버스의 유연한 움직임. 내 마음이 어디서 와서 어디를 향해 가는지 모르듯이 이 여행의 끝이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인지를 모르겠다.
오늘은 월요일이다. 한국에 있었으면 지금쯤 직장에 출근해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을 시간이다. 그 시간에 뉴질랜드의 남섬에 와서 이름도 모르는 길을 떠도는 신세다.
이제는 일행과 얼굴은 익숙해졌지만 이름은 제대로 알지를 못한다. 그저 대충 누구라는 인식이 여행지에서 새롭게 맺어준 인연이다.
퀸스타운에서 크라이스처치를 향해 가는 길에도 그간 보아왔던 초원과 호수와 민둥산이 반겨준다. 버스에 앉아 아름답고 미려한 팝송을 들으니 마음이 미적인 상태로 변해간다. 그에 따라 감정의 샘물도 차츰 차오르면서 생각의 강물을 따라 비망록에 어설프게 나를 그려본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이렇게 낯선 곳에서 방랑객이 되어 들녘을 떠돌며 감미로운 노래나 들으며 살아가란 의미는 아닐 것이다. 일상에 충실하고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계곡과 계곡 사이를 지나가는 버스가 아름답듯이 지금 이렇게 남섬에서 일행과 세상을 떠도는 것도 아름다운 비상이다. 사람은 고독해져야 자신을 돌아보게 되며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에 의문을 던지게 된다.
젊은 시절에 즐겨 들었던 감미로운 팝송이 오늘의 의미를 조화롭게 열어주는 아침이다. 이정표도 없는 한적한 초원길을 달려가는 집시 신세. 어쩌다 한국에서 이곳까지 내려와 들녘을 떠돌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오늘 가는 길이 아름답게 빛나기를 간절하게 소망한다.
삶은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행을 통해 넓고 깊고 심오한 마음의 깊이를 이해하며 삶을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번 여행에 동참한 것은 어쩌면 인생을 충실하게 살았다는 증거다. 나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에 대한 선택은 내가 아닌 주변에 의해서다. 드넓은 초원과 수려한 산자락이 층층이 겹친 남섬의 풍경.
일행을 태운 버스에서 들려오는 지나간 팝송의 노랫가락. 창안과 밖의 것이 정겹게 어우러져 안온하게 다가온다. 지금 가장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첫째는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고, 두 번째는 창밖에 보이는 풍경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버스를 타고 떠도는 여행은 몸은 고달프지만 따스한 공간을 공유하며 떠도는 방랑의 길이 더없이 고맙다. 시간이 흐를수록 태양은 서서히 구름을 걷어내어 고개를 내밀고, 창밖의 풍경은 무대를 연출하듯이 이산 저산이 차례로 지나간다.
이국에 와서 낯선 풍경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옛 시절에 즐겨보았던 푸른 산천과 초원을 다시 보는 기분이다. 한국을 떠나 낯선 거리를 방랑하는 것이 아니라 유년의 숲을 향해 떠나는 여정이란 생각이 든다.
아름다운 노래를 들으면서 마음에 남아 있는 문명의 찌꺼기를 하나하나 들녘으로 털어내는 중이다. 이렇게 버스에 앉아 유려한 강과 아름다운 호수나 바라보며 떠도는 삶은 없는 것일까.
내 옆이나 앞뒤의 일행은 지금 꿈속으로 먼 여행을 떠났다. 그에 비해 나는 버스 밖을 바라보며 현재의 시간과 순간을 즐기고 있다. 내 마음을 오롯이 알아주는 것은 나를 향해 뜨거운 열정을 보내는 태양과 이름 모를 가수의 감미로운 목소리뿐이다.
버스가 아무리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의 무풍지대가 끝없이 나타난다. 지금 버스가 어디를 향해 질주해가는 것인지 방향성을 모르겠다.
여행은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속을 걸어가는 방랑의 길이라는데. 나그네와 같이 떠도는 삶에서 여행이 전해주는 것은 나를 더 나그네답게 해 준다. 삶이란 막막한 사막을 떠도는 그런 것이 아닐까.
빨간색 오픈 차를 탄 연인이 휴가를 가는 것인지 버스를 앞질러 쏜살같이 내달려간다. 캡틴도 그에 뒤지지 않으려고 그 차를 따라잡기 위해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아댄다.
버스의 높아지는 엔진 소리에 맞추어 노래는 너울너울 춤을 추며 처량하게 울어댄다. 내 마음을 나도 알 수 없듯이 노랫소리에 맞추어 감미로운 감정이 들녘을 향해 부유한다.
도로의 굴곡이 심하지도 않고 깎아지른 깊은 산의 협곡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곳은 차를 타고 여행을 다니기에 좋은 도로 조건을 갖추었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처럼 사람이 살지 않는 초원의 너른 바다.
이곳에 와서 진정한 여행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몸이 편안하고 마음이 여유롭고 정신이 맑아지고 무언가에 쫓기는 것이 없다 보니 마음은 저절로 한가롭다.
버스 창밖에 보이는 것은 산자락을 향해 넘어가는 흰 구름뿐이다. 버스 안의 노랫소리가 여행하는 마음이나 달래라며 명상적인 노랫가락으로 바뀌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방랑의 길. 이런 맛에 사람들은 한국을 떠나 외국으로 여행을 가는 것이 아닐까. 외국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 쓴 글을 읽어보면 여행을 통해 자신에게 다가간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읽은 기억이 난다.
여행은 나와 너 대신 우리라는 동질성과 내 나라가 아닌 지구라는 넓은 무대로 안내하고 고독한 길을 따라 떠도는 외로움을 안겨준다. 외로움이 깊어질수록 생각이 솟아나듯이 버스에서 지체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을 향해 떠나는 마음의 골은 깊어만 간다.
내 마음에도 서서히 외로움이 둥지를 틀면서 고독이란 쓴 열매가 들어서기 시작한다. 도로와 초원을 구분하는 것은 두자 높이의 철조망뿐이다.
초원에서 철조망을 넘으면 도로고 반대로 넘으면 초원이다. 도로와 초원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양들을 보호하고 배려하는 경계의 선이란 생각이 든다.
오늘은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아침을 먹지 못한 한을 풀기라도 하듯 시간이 지날수록 속이 성난 계곡물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어제저녁의 술로 늦잠을 잤고, 술이 아침을 대신해 속이 텅텅 비었다.
지금 버스가 가는 곳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하늘에 뜬 태양을 따라 정신없이 달려간다. 버스 앞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야트막한 산자락이 손을 흔들면서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버스 안의 음악은 어느새 가수의 목소리 톤과 음색이 바뀌었다. 나도 마음의 색깔을 바꾸어 노랫소리에 따라 색다른 변화를 시도하는 중이다.
내가 가야 할 길의 끝이 보이지 않는 들녘의 여정. 어떤 삶이든 길은 시작이자 바탕이다. 길은 사람에게 밟힐수록 속살을 부드럽게 드러내지만, 사람은 밟힐수록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려고 한다.
아침에 숙소를 나와 한참을 달려왔지만, 버스 창밖에는 여전히 민둥산과 초원만이 반겨준다. 들녘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생각은 뉴질랜드인은 고독하고 외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사람을 좀처럼 만날 수 없는 초원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얻을 수 있을까. 아마도 고독과 외로움이 전부일 것이다. 사람은 고독한 존재인데 이들은 사람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 같다.
버스가 드넓은 초원을 달리고 나서야 작은 마을이 나왔다. 마을이라지만 십여 가구도 채 안 된다. 그저 지나가는 차량이 잠시 머물러 기름을 넣고 휴식을 취하며 뜨거운 차나 한잔 마시고 가라는 곳 같다.
일행과 버스에서 내려 편의점에서 커피 한 잔을 샀다. 커피잔을 들고 주변을 바라보니 먼 곳의 산에는 검은 원시림이 시야로 들어오고 편의점 옆에는 잔잔한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육류가 풍부해서 물고기를 잡아먹지 않는단다. 호수가 넓어 보이지 않는데도 물이 반 고기가 반 이란다. 호수에 들어가서 물고기가 정말로 많은지 확인하고 싶지만, 이해가 간다.
마을에서 휴식을 끝낸 버스가 다시 고독하고 외로운 들녘을 질주해간다. 버스가 가는 길에 경비행기가 하늘을 가로질러 어딘가로 날아가고, 버스는 전봇대의 숫자를 헤아려 가며 멀리 보이는 산을 향해 갈 길을 재촉한다.
오늘은 이쯤에서 여행의 감상을 접어야겠다.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은 메말라 가고 단어와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다. 메마른 가슴에 샘물을 재충전하라는 신호다.
여유가 마음의 풍성함으로 이어지고 감정을 소비하다 보니 몸에서 재충전 신호를 보낸다. 이제는 가수의 목소리가 눈꺼풀을 무겁게 내리는 소리로만 들려온다.
오늘은 이만 꿈속으로 여행이나 떠나야겠다. 꿈속에서 새로운 기운과 감정을 충전하고 나면 힘이 솟아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