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포드사운드 대협곡

by 이상역

빙하로 깎여나간 거대한 바위 절벽과 만년설이 연출한 밀포드사운드 대협곡 관람을 마치고 숙소인 퀸스타운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영어로 사운드란 의미에는 소리 외에 해협이란 뜻도 포함되어 있다. 뉴질랜드 남섬의 끝에 자리한 신비한 피오르드 밀포드사운드. 일행과 한 시간 반 동안 배를 타고 밀포드사운드 구경을 끝냈다.

영국인이면 생전에 꼭 한 번 찾아오고 싶어서 버킷리스트에 올린다는 밀포드사운드(Milford Sound). 흰 눈과 폭포와 거대한 바위가 연출하는 태초의 꿈을 간직한 자연의 무대.


웅장한 바위와 산과 바다가 어우러져 펼치는 모습은 마치 신의 섭리를 따르라는 무언의 힘으로 다가왔다.


밀포드사운드에 무리를 지어온 한국인과 일본인과 중국인. 이들 모두 유람선 갑판 위에 서서 한 컷의 영혼을 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일 년 중 이백일은 비가 와서 구경하기가 힘들다지만 우리가 도착하자 맑은 하늘을 내보이며 마음껏 속살을 들여다보라며 유혹했다.


자연만이 펼칠 수 있는 장엄함에 매료되어 넋이 빠질 정도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연 앞에 선 나약한 존재감만 느꼈을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밀포드사운드는 마치 지구의 남극을 떠받치고 있는 듯 웅장했다.

육중한 바위산이 뉴질랜드를 상징하는 것처럼 바라보였다. 가파른 검은 바위 절벽에서 불꽃같은 생명을 이어가는 초목은 뉴질랜드인의 강인한 생명력처럼 다가왔고, 거대한 바위 위에서 자연에 융화되어 고고한 자태를 드러낸 초록은 경이로웠다.


마치 뉴질랜드인의 개척정신과 마오리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거대한 바위와 물보라를 일으키는 폭포와 흰 설경은 지상에서 펼치는 베토벤의 소나타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연출되고 있었다.


오늘도 버스를 운전하는 캡틴은 갈 길이 바쁘다는 듯이 서두른다. 여행은 언제나 삶의 터전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여정이듯이 오늘도 출발했던 자리로 되돌아가기 위해 바쁘기만 하다.


선상에서 찍은 사진처럼 인생은 잠시 세상에 존재하다 짧은 흔적을 남기고 사라지는 존재가 아닐까. 밀포드사운드는 인공에 인자도 개입할 수 없는 태초의 땅 그대로였다. 사람이 한 일이라곤 도로를 내고, 배를 만들어 바다에 띄우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만들어 밀포드사운드를 내려다보는 것이 전부였다.


오늘의 여정이 힘들었는지 일행은 버스에 오르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잠을 잔다. 가이드가 버스가 밀포드사운드를 출발하자 이별 노래를 틀어준다. 그러자 일행은 기다렸다는 듯이 기도문을 외우며 잠을 잔다.


버스 안에는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고 캡틴의 곡예 운전에 따라 몸을 이리저리 흔들거리자 감정의 끝자락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푸른 초원과 아름답고 웅장한 자연을 간직한 ‘아우테어로아’. 감미로운 음악에 맞추어 덩실덩실 달려가는 버스의 유연한 움직임. 지금의 이 모든 상황이 톱니바퀴처럼 틀에 맞추어 돌아가는 것 같다.


낯선 여행지로 다가갈 때는 기대감과 설렘의 마음을 안고 가지만, 낯선 것이 익숙해질 때쯤 다시 등을 지고 되돌아서면 상실감과 외로움을 안고 돌아온다.


여행의 상실감은 다가갈 때는 드러나지 않지만 돌아오는 길이 되면 커져만 간다. 공기가 맑아서 그런지 피부에 와닿는 햇빛의 강도가 따뜻하다.


파란 하늘은 끝없이 높아만 가고 끝없이 펼쳐진 초원은 이곳이 한국이 아닌 뉴질랜드라는 사실이 확실해진다. 한국에서 가을을 등지고 남반구에 내려와 봄을 가슴에 안고 들녘의 벚꽃과 풍경을 바라보는 중이다.

오늘로써 이곳에 온 지 다섯째 날이다. 여행을 다닐 수 있는 기간이 절반은 지나간 셈이다. 뉴질랜드에 와서 정신없이 일정에 쫓기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자가용을 타고 관광지를 돌아보는 것보다 버스에 앉아 여행의 심정을 그리는 마음이 더없이 즐겁기만 하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초원의 평야를 따라 흘러가는 버스에 기대어 풀어내는 손길이 애틋하다.


뉴질랜드 남섬이란 낯선 곳에서 국적이 같은 사람들과 무리를 지어 다니며 그 속에서 나의 감정을 달래는 시간이 그저 기쁘기만 하다. 일행도 여행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바쁜 나날을 보낼 것이다.


한국에서 평소 생활하던 일상을 접고 뉴질랜드 남섬에 와서 함께 숙식하고, 관광지를 돌아보고, 버스를 타고 졸면서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른 채 이방인 캡틴에게 몸을 맡기고 낯선 초원을 떠도는 신세다.


버스의 오른쪽 방향에서 사정없이 내리 꽂히는 햇살의 뜨거움. 직진으로 내리쬐는 햇빛이 피부에 해롭다지만 내게는 나를 알아주는 유일한 친구처럼 반갑기만 하다.


남섬에서 나를 알아주고 이해하는 친구는 오직 남극의 태양뿐이다. 무슨 사연을 끄적거리나 훔쳐보려고 곁눈질하면서 동행을 해준다.


버스 안의 라디오에서는 여전히 이름 모를 여가수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가슴 밑바닥에 흐르는 감정의 끝자락을 끝없이 건드려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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