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생명을 얻는 것은 기쁨이요 환희다. 탄생은 근원의 물줄기를 이어가는 신생이다. 계절의 순환으로 봄이 되자 매화꽃, 산수유꽃, 목련꽃이 순서대로 피어난다. 봄에 핀 꽃은 손주의 해맑은 웃음처럼 환한 미소를 짓게 한다.
나는 두 번의 유산이란 고통 끝에 큰딸을 얻었다.
결혼하던 해 아이가 들어섰는데 첫 아이는 손도 써볼 겨를 없이 이별했다. 남들은 결혼해서 아이를 쑥쑥 낳아 잘만 기르는데 아내와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한번 유산을 겪고 나자 아이를 갖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사람의 일은 신경을 쓰거나 조급해할수록 더디게 진행되는 것 같다.
그때 아내와 맞벌이를 해서 두 번째 아이가 들어서면 아내는 휴직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내가 입덧이라도 하면 아이가 들어섰을 때 조심이라도 했을 텐데 아이가 들어섰는지도 모른 채 또다시 이별해야 했다.
두 번의 유산을 겪고 세 번째 아이가 들어섰을 때는 아내가 직장에 휴직을 내고 고생해서 어렵게 딸을 얻었다. 신생아실 유리창을 통해 갓 태어난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듯이 기뻤다. 그렇게 큰딸이 태어났고 세 살 터울의 막내딸까지 태어났다.
내가 두 딸을 데리고 고향에 가면 어머니는 집안에 아들이 있어야 한다며 아들 하나를 더 낳으라고 독촉하셨다. 우리는 두 딸로 만족하며 사는데 어머니나 부산 이모는 아들이 집에 있어야 든든하다며 아들 하나를 더 낳으라고 강요하듯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아들을 낳으라고 한 것은 집안의 대를 잇고 조상을 모셔야 한다는 유교적 믿음에서 비롯된 것 같다. 집안의 대를 잇고 조상을 모시는 일은 딸도 할 수 있는데 왜 그토록 아들을 낳으라고 한 것일까.
큰딸이 결혼하고 수년 만에 손주를 낳았다.
고통의 시간과 인내의 기다림 끝에 집안에 손주가 태어나자 반가움은 봄꽃에 비할 바 아니오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아기는 여린 꽃이라더니 맞는 말인가 보다. 봄에 핀 꽃은 바라볼수록 꽃 속에 빠져들듯이 방긋방긋 웃는 손주를 바라보면 한없이 빠져든다.
손주가 태어나고 주말마다 딸네 집으로 손주를 보러 간다.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손을 씻고 나와 손주가 무엇을 하고 노는지 살펴본다. 손주가 분유를 먹고 놀고 있으면 번쩍 들어 품에 안는다. 내 품에 안긴 손주가 몸짓과 발짓을 해가며 방긋방긋 웃는 모습은 마치 봄날에 핀 봄꽃과도 같다.
나이 들어 손주를 품에 안는 감정이 딸을 키울 때와 사뭇 다르다. 손주가 더 귀엽고 사랑스럽다. 꽃을 품에 안을 때 꽃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듯이 손주를 품에 안을 때도 행여 놓칠세라 떨어질세라 마음을 졸인다.
손주는 품에 안을 때마다 힘이 새록새록 샘솟는다. 내가 낳지 못한 아들이고 어머니의 말씀처럼 집안의 대를 잇고 든든한 아들이라서 살맛이 난다. 고향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면 "어머니! 제 딸이 어머니가 원하시던 손주를 낳았어요"라고 말씀드리면 어머니는 "잘했네."라면서 웃으신다.
손주는 근원의 뿌리를 생각나게 하는 생명의 모태다.
내 부모님도 나와 같이 손주를 사랑하셨을까. 할아버지가 되어 손주를 품에 안고 느끼는 감정을 부모님도 똑같이 느끼셨을까. 부모님의 품에 안겨 재롱떨며 사랑받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손주가 내 품에 안겨 재롱을 떠는 모습을 바라볼 때면 부모님이 생각난다.
특히 십 수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더욱 보고 싶다. 아버지에게 증손주를 보여드리고 싶은데 보여드릴 수 없어 아쉽고 안타깝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손주를 자랑삼아 보여드렸을 텐데. 그러면 아버지가 "허허허" 웃으시며 "그놈 커서 장군이 될 놈이네."라는 말씀도 들었을 텐데….
고통과 시련 속에 얻은 큰딸을 어떻게 키우고 재웠는지 하는 소소한 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손주를 품에 안고 있으면 큰딸과 함께 보낸 시간과 부모님의 얼굴이 무시로 떠오른다.
손주를 통해 부모님과 나를 연결 짓고 근원을 찾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핏줄에 대한 사랑이다. 부모님과 나와 딸과 손주는 한 뿌리의 자손이자 후손이기에 뿌듯하고 자긍심이 인다.
이 세상에 태어난 손주가 봄꽃처럼 생명을 활짝 꽃 피우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사랑스러운 손주가 품에 안겨 앙증맞게 웃을 때마다 부모님의 품속과 따뜻한 사랑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