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영산홍

by 이상역

영산홍은 진달래과에 속한 상록의 관목으로 1미터 정도 자라고 잔가지가 많고 잎은 어긋나서 바늘 모양인데 가장자리는 밋밋하다. 일본이 원산지로 4~5월 가지 끝에 담홍색의 꽃이 핀다.


영산홍은 봄에 피는 꽃인데 봄이 지나고 가을에 손주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대여섯 송이가 피었다. 손주를 재우러 밖에 나가 영산홍이 핀 근처에 다다르면 손주에게 "영산홍은 봄에 피는데 가을에 날씨가 봄과 비슷해서 피었네"라고 말해주곤 한다.


그러자 엊그제 손주를 재우기 위해 영산홍이 핀 근처를 지나가는데 손주가 내게 "영산홍은 봄에 피는 건데 가을에 피었어, 계절을 잘못 알고 나왔어!"라고 말한다.


손주의 문장 구사 능력이 나날이 발전해 간다. 손주가 말한 내용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다. 영산홍은 봄에 피는 꽃이라는 것과 가을에 핀 것은 잘못 피었다는 의미 즉 계절과 꽃이 피는 시기를 구분하는 것이다.


게다가 봄에 피는 꽃이 가을에 핀 것은 계절을 거슬러 피었다는 것까지 문장을 연결해서 구사한다. 성장하는 아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는 것 같다.


영산홍이 가을에 핀 것을 말해주자 그 말을 다른 것까지 연결 짓는다. 국화꽃을 바라보며 "국화꽃은 봄에 피는 건데 가을에 피었어"라고 확장해서 말을 한다.


손주가 하는 말을 바르게 시정해 줄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나무나 꽃의 진정한 의미는 좀 더 자라면 스스로 깨우칠 텐데 굳이 잘못 말한 것을 시정해 줄 필요는 없을 듯해서다.


손주는 아파트 단지에서 자라는 나무의 이름을 거의 다 다. 손주를 안고 가다 나무를 가리키며 "이건 무슨 나무야!"라고 물으면 나무 이름을 말한다. 물론 나무와 꽃 이름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말은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져 받침이 들어 있는 단어는 발음을 강하게 해야 한다. 단지 내에 배롱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손주에게 "저 나무는 배롱나무야!"라고 말해준다.


그러면 손주는 더듬거리며 "배롱나무"라고 따라 한다. 그리고는 손주에게 "배롱을 강하게 발음해야 해"라고 말해주니 손주가 "배롱"하고 따라 한다.


며칠 후 손주를 재우러 가면서 배롱나무 근처를 지나가다 순주에게 "저건 무슨 나무야!"라고 물었다. 손주는 "배롱나무"라고 하고는 "강하게 발음해야 해"라고 한다.


아이에게 우리말을 가르쳐주는 것이 재미있고 흥미롭다. 손주에게 나무 이름을 가르쳐주면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손주가 나무 이름을 말하고 강하게 발음해야 한다고 말한다.


두 돌이 갓 지난 아이의 언어 습득 능력은 물 먹는 솜처럼 있는 그대로 스며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것에 대하여 말을 해주면 그 말을 정리해서 내게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대견하고 신기하다.


아이는 부모나 어른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한다.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지나가는 말로 하는 것까지 기억해서 말하는 것을 보면 아이 앞에서 언어는 항상 조심하고 주의해야 한다.


며칠 전 할머니가 손주를 보면서 손주가 고집을 부리면 똥고집을 부린다고 말한 것 같다. 손주가 장난감을 갖고 노는데 할머니가 "그만 고집부리고 맘마 먹으러 와?"라고 했더니 손주가 "똥고집 부린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할머니가 손주에게 쪼르륵 달려와 "내가 언제 그런 말 했어!"라면서 함박웃음을 짓는다. 아이가 하는 말은 분명 누군가에게 들었기 때문에 은연중에 튀어나오는 것이다.


손주와 공원에 올라가 밤나무 밑에 가서 떨어진 알밤을 보곤 내가 "어이쿠! 밤 주웠네!"라고 말했더니 손주가 그대로 따라 한다. 그리고 밤송이를 바르며 "에이! 벌레 먹었네! 에이 썩었네!"라는 말도 그대로 따라 한다.


언젠가 손주 스스로 봄에 피는 영산홍이 가을에 피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더 성장해야 한다. 아이는 홀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와 어른과 주변의 환경과 어울려 성장해 간다.


손주를 재우러 밖에 나가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손주가 더 자라면 밖에 데리고 나가는 것도 못 하고 그에 따라 손주와 함께 아파트 단지 내에서 자라는 나무나 풀이름도 가르쳐 줄 수 없다.


내년에는 손주가 더 자라서 잠을 재우러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올가을에는 손주와 계절을 만끽하며 아파트 단지를 돌며 꽃과 나무의 이름을 부지런히 알려주고 싶다.


그것이 세상에 태어난 손주와 인생의 한 시절을 즐겁게 보내는 순간이고 나중에 손주가 할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을 되돌아보며 그리움으로 남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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