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삼월에 생각나는 것

by 이상역

시골에서 태어나 마을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며 지내던 때가 생각난다. 산 너머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지고 아랫동네를 지나면 어떤 마을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과 낯선 곳에 가고 싶다는 꿈을 꾸며 자랐다.


그러다 춘삼월에 아버지 손을 잡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산 너머 낯선 세상에 다른 마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구쟁이가 만난 세상은 신세계나 다름이 없었다.


초등학교 주변에 사는 친구와 운동장을 누비며 생활하다 다시 잣고개를 너머 읍내에 소재한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또 다른 신세계를 만났다. 세상은 아랫마을 보다 더 넓은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의 눈은 상급학교에 올라가고 직업의 세계에 들어서면서 점차 높아지고 증폭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세상 사람과 관계도 맺고 인연을 이어가며 살아간다.


춘삼월은 새로운 계절을 만나기도 하지만 새로운 얼굴을 만나는 계절이다. 올해 학교에 입학하거나 직장에 들어간 사람들 앞에 펼쳐지며 만난 세상은 아마도 신세계로 다가오지 않을까.


중학교에 입학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운동가에 늘어선 자전거 행렬이다. 약 천여 대에 이르는 자전거가 운동장가에 줄지어 선 모습을 보며 "아하! 이런 멋진 세상도 있구나"하는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음악 시간에 배운 "보리밭"이란 노래다. 음악 선생님이 한번 부르고 난 뒤에 친구들과 함께 불러본 "보리밭"이란 노래는 춘삼월에 아지랑이가 피어나듯 신선하게 다가왔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보리밭', 박화목 작사, 윤용하 작곡)


이 노래는 고향의 보리밭을 배경으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감정을 섬세하게 그렸다. 부드럽고 서정적인 멜로디는 가사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듣는 사람에게 따뜻한 향수와 아련한 정서를 느끼게 한다.


당시 중학교 앞 넓은 뜰에는 춘삼월이면 푸른 보리싹이 자라고 있었다. 학교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면서 보리밭을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보리밭" 노래를 부르면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주변에서 아무도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이 노래를 목소리 높여 부르면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노래를 부르면서 자주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학창 시절에 신세계로 다가왔던 그리운 물결은 지금은 추억으로 남아 그 시절을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다시 "보리밭" 노래를 불러보니 그 시절의 감정과 정서를 느끼지는 못한다.


삶은 자라는 과정에서 신천지나 신세계를 만나게 되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서는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 줄어들고 그저 그런 풍경과 이미지로 다가와 흥미와 관심이 사그라든다.


그리고 춘삼월이면 생각나는 것은 학창 시절과 직장 출근길에서 만난 개나리꽃의 향연이다. 노란 꽃망울이 덤불숲에 무리를 이루어 핀 모습을 만났던 환희는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이가 들고 보니 이제는 산 너머 낯선 세계나 마을보다 봄철에 피는 꽃과 산자락에 연두색으로 피어나는 나뭇잎의 신록이 신세계로 다가온다.


사람은 성장기에 눈이 높아지고 확대되다 중년의 나이를 넘어가면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본래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고향을 떠나온 날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인생의 후반기를 건너가는 세월이다. 고향을 나와서도 삶은 늘 고향에서 살던 것을 기준 삼아 행동하고 여겨왔는데 이제는 그 기준도 효력을 다한 듯하다.


지금도 춘삼월이면 고향에서 보고 맞이한 자연의 세계와 익숙한 얼굴들이 생각난다. 비록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자주는 아니더라도 "보리밭" 노래의 가서처럼 고향의 그리운 것을 뒤돌아보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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