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근한 수록 Feb 24. 2022

세상은 고도로 발전했고, 나는 그저 의존했다.

 집에 와이파이가 고장났다. 이른 새벽이라 손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먹통이 된 와이파이 기계를 바라보다 인터넷 없이 못할 게 뭔가 싶어 그냥 내버려 뒀다.

 너무나도 못할  천지였다. 나는 엄마 잃은 아가처럼 모든 일에서 방황했다. 아침을 여는 명상이나 스트레칭은 언제나 유튜브의 도움을 받아서 해왔다. 세상에 널린 게 컨텐츠인데 굳이 내 기억으로 해낼 필요가 있나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막상 와이파이가 고장나고 보니 명상을 할 수가 없었다. 시간도 유튜브가 재 줬었는데, 마음을 다스리는 말들도 유튜버가 해 줬었는데…. 어떻게 했더라? 과거의 경험을 이 잡듯 뒤졌지만 내 머릿속은 텅 비어있었다. 영상 속 유튜버가 하라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인 탓이었다. 우리가 번거롭게 했어야 했던 일들을 모두 기계에 떠넘긴 대가는 무척이나 혹독했다.




응, 의존할게

 그러고 보니 내 모든 삶은 '기억하기'에서 멀어져 있다. 요즘 헬스장에서 그룹 피티를 받고 있는데, 어느 날 저녁 동생이 물었다.

 "언니, 나 등이 너무 뻐근한데 등 운동이나 스트레칭 뭐가 좋아?"

 머릿속은 내가 언제 운동을 해봤냐는 듯 새하얬다. 생각을 쥐어 짜내 보았지만, 기껏해야 어제 했던 몇 개의 운동이 떠오를 뿐이었다. 그게 등을 타깃으로 하는 운동이었는지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재빠르게 인터넷 검색을 하고 나서야 몇 가지 동작을 알려줄 수 있었고, 나는 또다시 운동에 대한 기억은 멀리 어딘가로 날려 보냈다. 철저히 정보에 의존하고, 이를 기억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는다. 뇌는 24시간 내내 쉬고 있었다. 의존적인 삶은 평소에는 자각하지 못하다가 가끔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 닥칠 때면 잠시 당혹스럽고 만다. 그뿐이었다. 하다못해 어제 아침으로 먹은 메뉴도 찍어둔 사진을 보지 않으면 기억을 못 하는 세상으로 나를 욱여넣고 있었다.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느냐는 의문은 오늘 새벽, 와이파이가 고장나고 나서야 스물스물 올라오기 시작했다.




안되면 기록할게

 그리고 이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휴대폰이 나오고부터 우리 엄마는 내 번호를 못 외우신다. 대신에 휴대폰에 내 번호를 저장하신다. 휴대폰이 나오기 전, 수첩에 일일이 기록해 뒀던 전화번호들도 몽땅 핸드폰 하나에 들어가 버렸다. 그래도 다행인 건 기록이라는 걸 하겠다는 의지다. 다만 조금 더 간편하게 하겠다는 마음이 앞선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예전에는 작은 노트나 수첩, 다이어리를 들고 다니며 기록하는 게 일상이었다. 낡은 수첩을 뒤져보면 그 당시 상황이 드러나는 메모들이 참 많을 정도로 별별 내용을 다 써놨다. 점심으로 먹을 토스트 메뉴부터 친구한테 받을 오천 삼백 원까지 적혀있다. 휴대폰이 보다 대중화되고부터는 휴대폰 메모장에 하나 둘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하다 하다 쓰는 것도 귀찮다며 사진을 찍어댄다. 대학교 수업을 들을 때도 강의 내용을 적기보다 강의자료를 찍어가고, 운동이나 식사 기록을 할 때도 사진을 찍어 올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점점 내 몸은 더 쉽게 얻어갈 궁리를 한다. 나의 기억력은 더 중요한 데에 쓰려고 꽁꽁 아껴둔 것처럼 능력 한 번 발휘해 보지 못하고 깊숙한 곳에 묻힌다.



생각'하는' 사람으로

 빠르고 영특한 기술을 이용하는 것. 참 좋다. 문명의 발전을 잘 활용하는 것이 영리한 건 분명하다. 그러나 너무 무분별한 의존은 지양하고 싶다. 당장 휴대폰 하나만 사라져도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 인터넷이 끊기면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사람으로 살다 죽을 순 없다. 조금 귀찮고 번거롭더라도 손으로 적어 내려 가는 참맛을 느끼고, 머릿속으로 기억해보려고 애쓰며, 주체적으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으로 살다 가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포기할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