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사람
'해가 길어졌구나.' 아침에 일어나서 창밖을 보니 이미 아침이었다. 6시에 새벽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해지는 시기다. 침대에 누워서 눈을 끔뻑거리다가 밖을 내다보다, 침대에 걸터앉았다가, 어슬렁어슬렁 방안을 배회했다. 은근한 무언가에 밀려가듯이 몸을 움직였다.
요즘 나는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일기를 쓰고 사람들에게 내보이고, 하루 종일 일기로 무엇을 쓸까 살피는 일 전부가 잘한 것 같아서 살짝 코를 씰룩거렸다. 글이라, 글은 커녕 무언가를 쓰고 말하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만일 세상의 사람이 두 종류로 나누어져 있어서, 하나는 쓰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읽는 사람이라면 나는 분명 읽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무엇을 쓰더라도 그것이 무엇도 자아낼 수 없는 나라서 차라리 읽는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덜 비참하고 싶었다.
지금에 와서도 그 마음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겸손 같은 것이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면 조용히 읽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아직도 이렇게 뭔가를 쓰고 있다. 이게 웃을 일인지, 웃지 못할 일인지, 뭐가 뭔지, 쩝.(사실, 읽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나뉘어있을 리 있나, 내 열등감이 쪼개놓은 것이다.) 일기를 써놓고 보면 이건 단어를 뭉쳐놓은 것 같기도 하고, 문장을 되는대로 이어붙인 것 같기도 해서 부끄러운 데도 '참 열심히 쓴다.' 싶다.
다른 것은 없었다. 그저 수다쟁이라서, 겁쟁이라서, 열등감에 푹 절여진 나라서 글을 쓰는 것뿐이었다. 쓰면 쓸수록 좁아터진 스스로를 보는 것은 부가적인 산물이었고. 가끔은 '돈도 안 되는 짓을 왜 하고 있나.'는 생각도 했었다. 어떤 때는 내가 써대는 것들이 눈살 찌푸려지는 배설따위일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나는 쓰고 있다. 어느 날은 봐줄 만한 것도 나오겠거니 하면서, 그러려니 하면서 끄적거리고 따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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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생님은 내 일기 중 어떤 것으로 작은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어떤 선생님은 내 일기 중 어떤 것이 짧아서 화가 났다고 했다.
어떤 선생님은 내 오늘 일기가 무엇이냐 물었고, 어떤 선생님은 내 외로움을 안쓰러워했다.
어떤 선생님은 내게 공명하듯 노래를 지어냈고, 어떤 선생님은 잠잠히 고개를 끄덕였다고 했다.
어떤 선생님은 답장처럼 자신이 소중히 써 내려온 이야기를 내게 주셨다.
어떤 선생님은 내게 더 좋은 이야기를 쓰라며 무언가를 손에 쥐어주셨고,
어떤 선생님은 손에 쥔 그것을 칠칠치 못하게 잃었더니, 또 다시 구해다 쥐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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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입에서 "내가 일기 쓰는 것을 기다린다."는 말을 들었다. 누군가는 나와 이야기해보고 싶다고 했다. 누군가는 내 이야기에 응답했다. 누군가는 자신의 글을 보여주었다. 또 누군가는 나의 좁다란 외로움을 알아채주었다. 누군가는 나의 너절한 괴로움도 좋다고 했다. 누군가는 내게 고맙다고 했다. 누군가는 내게 노래를 주었고, 그 결국으로 모두는 내게 자기 자신을 형편대로 조금씩 떼어 주었다.
내게 다시 이런 날이 올까 싶다. 나는 오늘 내내 작가가 되고 싶었다. 다른 무엇으로 밥을 벌어먹든 간에,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이 거지 같은 몰골의 문장과 단어들도 사랑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다.
암 투병으로 교단을 떠나시면서 이제는 찾아뵐 수도 없는 분이지만, 내 중학교 은사님이 기억났다. "뭐가 되는 간에 써라. 울분을 토해낸 것이라도 그것을 읽어줄 사람이 한 사람은 있을 테니까, 계속 써라." 당신께서는 옳은 말씀을 하셨다.
앞으로도 나는 여전히 이런 것들 밖에 못 써낼 테지만, 요 몇 주 덕분으로 여러 해 더 끄적거릴 힘을 얻었다. 그저 계속해서 쓰는 수밖에 없다. 계속 쓸 수 있는 경계심과 양심이 내게 오래도록 머물기를 기도한다.
추신, 국어선생님으로부터 내 글에 맛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켜켜이 쌓여있던 열등감 중 얼마가 녹아 무너져내렸다. 내가 팔찌를 잃어버렸다고 징징거렸더니, 그걸 또 어떤 선생님이 챙겨주었다. 괴로움이 흩어져 간다. 내가 받은 이 모든 것이 돌고 돌아서 다시 나 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가닿기를 바란다. 그리고 4월 16일의 괴로움에게도 약소하나마 가닿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