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낚시 라면에는 살짝 된장을 풀어야 해.

장인어른

by 서량 김종빈

“형, 저 큰일 났어요. 아침에 일어나시면 바로 연락 좀 주세요.” 아침부터 아는 동생이 한국에서 문자를 보내왔다. 시차를 생각하면 여기가 아침이니, 저쪽은 이제 저녁 8시쯤 되었겠다. 무슨 일인가 했다. 혹시 녀석들 중에 누구 하나 사경을 헤매는 건 아닌가 싶어서 출근도 늦춰가며 연락을 넣었다.


“야, 문자 봤다. 무슨 일인데? 무슨 큰일인데? 누구 죽었나? 무슨 일 있나?” 다급한 내 물음에 녀석은 생각보다 여유로웠다. “아니요, 형, 그런 일은 아니구요. 그냥 좀 큰일인데, 그냥 저한테 큰일인데요.” 다행히 누가 죽거나 한 건 아니었다. 몇몇을 보내고 나니, 별 것 아닌 일에도 내가 이렇다.


어쨌거나 큰일은 이랬다. 동생 녀석이 여자 친구의 집에 인사를 갔는데, 아버님이 술을 잔뜩 주시는 덕분에 장인어른 되실 분을 만취한 채로 끌어안고 뺨에 뽀뽀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날 밤을 정신없이 보내고 아침에 여자친구 집에서 일어나 예비 장모님께 아침밥상까지 받아먹었는데, 식사 내내 아버님이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는 거다.


“형, 저 이거 어떻게 수습해야 돼요?” 동생이 물었다. “망할 놈, 난 또 누가 뒈지기라도 한 줄 알았다.” 나는 아침부터 낄낄거리며 한참을 웃었다. 녀석이야 한참 심각하겠지만, 아침부터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니 내가 사람 복이 있긴 한가보다.


“아, 웃지말구요. 여자친구도 그날 그냥 웃겼다고만 하고 미치겠어요.” 녀석은 내게 만회할 방법을 물었다. “야, 내가 어떻게 알아, 킄킄킄, 결혼도 안 해봤는데, 킄킄킄, 나야 모르지, 킄킄킄.”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녀석이 결혼도 안 한 내게 이런 걸 묻는 이유는 알겠다. 예전에 내 이야기를 듣고 잊지 않은 거겠지. 예전 여자친구 아버님과의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는데, 그걸 잊지도 않고 말이다.


생각해보면 그때 나도 참 대단했지. 겁도 없이 여자친구 집에 인사를 드리러 갔으니 말이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과일이나 소고기를 사들고 덜컥 찾아뵙는 민폐를 참으로 씩씩하게도 했다. 혹시 아버님이 약주를 좋아하신다하면 그 날은 면세양주를 한 짝 들고 찾아갔었다. 어머님이 싫어하실 것도 모르고 정말 의기양양하게 말이지.


그래도 크게 미움은 받지 않아서, 저녁밥까지는 얻어먹고 나올 수 있었는데, 그렇게 몇 번 하다 보니 낯이 두꺼워지더라. 결국 아버님의 취미생활까지 따라다니는 일이 생겼다.


어느 아버님은 저녁에 테니스를 치셔야 했고, 또 어느 아버님은 밤낚시를 즐기셨다. 딸 부잣집의 아버님은 목욕탕이나 함께 가자고 하셨고, 한 번은 찾아뵈었더니 농사일이 바쁘신 분도 계셨다.


테니스는 고작해야 서브나 좀 넣을 줄 아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점수 한번 따 보겠다고 코트 위를 이리저리 미친 듯이 뛰었던 기억. 밤낚시하시는데 그 옆에서 라면 끓여가며 아버님의 낚시학개론을 졸음 참아가며 밤새 들었던 기억. 목욕탕에서 우리 아부지 등도 언제 밀어드렸나 가물가물한데 정말 세신사 뺨을 후려칠 정성으로 아버님 등을 밀어드렸던 기억. 농사일은 고작 텃밭에 감자 고구마나 좀 해본 주제에 수박밭에서 온종일 헛짓했던 기억. 이제는 사랑했던 연인들보다 아버님들이 더 기억날 정도니, 이것 참 곤란하다.


나는 동생 웃으며 다독였다. “야, 걱정 말고 제수씨에게 장인어른 되실 분 연락처 받아서 오늘 찾아뵈어도 되는지 여쭈고 가서 다시 인사드려라.” 사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조언이 뭐가 있겠나. 그냥, 나라면 그랬을 것 같아서 얼굴에 철판 깔고 자꾸 찾아뵈라는 수밖에 없지. 하다못해 미운 정이라도 들게 말이야.


생각이 난다.


예전에 사귀던 친구와 헤어지고 좀 지나 아버님이 연락을 한번 주신 적이 있었다.

P : 어, 그래, 종빈아, 잘 지내지?

B : 아, 예, 아버님,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버님 건강하시죠?

P : 그럼, 건강하지, 그래, 너는 별일 없고?

B : 예, 그럼요. 건강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P : 그래, 그럼 언제 와서 밥이나 한번 먹자.

B : 아, 네, 아버님. 나중에 한번 시간 되실 때 연락 한번 드리겠습니다.

P : 그래, 그럼 이번 주말에 한번 보자.

B : 아, 아버님, 제가 시간이 좀 안돼서.

P : 요즘 누구 만나는 사람 있나?

B :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닌데, 제가 이제 댁에 찾아뵙는 게 좀 이상해서요.

P : 남녀가 만나다 보면 헤어지기도 하고 또 만나기도 하는 거다. 집에 와서 밥이나 한번 먹자.

B : 아버님, 감사합니다. 근데, 제가 요즘 정말 바쁘기도 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P : 요즘 우리 OO이도 바빠서 누구 안 만나는 것 같던데, 그러지 말고 다시 이야기 좀 잘해봐. 같이 살다 보면 연애할 적에 티격태격한 건 다 별거 아니구나 싶다.


이제 다른 건 미련이 없는데 그 시절 챙겨주시던 아버님 ‘한 번만 더 찾아뵙고 인사드릴걸.’ 싶은 게 아쉽다. 그래도 라면 참 맛있게 끓인다며 그렇게 칭찬을 해주셨는데, 그게 참 죄송하고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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