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생 김종빈, 始發!_초고

35살

by 서량 김종빈

나이를 먹는 일은 서러운 일이다. 그리고 서러운 것 이상으로 무서운 일이다. 이제 며칠 뒤면 이 무섭고도 서러운 일을 다시 또 겪는다.


누가 보면 한 소리 할지도 모르겠다. 젊은 놈이 무슨 엄살이냐고 말이다. 혹은 팔다리 성한 놈이 기운 빠지는 소리나 해댄다고 역정을 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의 서러움은 살짝 좀 다르다.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은 서러울 것도 아니다. 전처럼 한껏 난동을 부릴 수 있으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안되면 그건 또 별 수 없는 일이다. 미간에 주름이 더 짙어진다던가, 눈매가 능글맞아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그래?"하고 말아버리면 그만이다.


시간은 누구할 것 없이 움켜쥘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나만 특별대우를 바라는 것은 도리어 몰염치한 일이다.


그럼에도 나이를 먹는 일이 무섭고 서러운 것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기분 탓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지금보다 배는 더 소심했다. 그 소심함이 극에 달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방학이 끝날 무렵이었다. 왜 소심한 주제에 대책 없는 애들이 있는데, 그게 나였다.


방학숙제가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방학을 보냈다. 일기장은 점 하나 찍혀있지 않았고, 만들기나 그리기 같은 건 주제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대책 없이 빈둥거렸으면 벌도 묵묵히 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또 그런 대범함은 없어서, 방학 끝 무렵이 되면 안절부절 못하며 벌벌 떨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모양새가 참 볼품없었다.


그런데 그 볼품없음은 어른이 되어도 변치 않는 걸까. 방학숙제로 쩔쩔매던 때로부터 스무 해도 더 넘었건만 여전하다.


올해는 가는데 나는 한 것이 없다. 나이는 먹었는데 나이에 부끄럽지 않은 나는 어디에도 없다. 매해, 마음만 앞서서 멋대로 저지르다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날만 삼백하고도 육십 다섯 번이었다.


물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먹고사는 일이 바빴고, 세상은 더 바빴다. 그 틈바구니에서 내 자리 한번 만들어보겠다고 꾸역꾸역 버티다보니 다른 건 생각조차 못했다. "그냥 매일매일 사는 것도 얼마나 힘든데!" 라고 도리어 성을 내고 싶은 날도 많았다.


하지만 사실 그런 변명들이 내 기분을 나아지게 하지는 못하기에, 입은 다물고 멍청한 표정으로 달력만 볼 뿐이다.(아니까, 그 변명들은 고작해야 변명이라는 걸아니까.)


뭔가 굉장한 걸 이뤄내고 싶었던 것도 아닌데, 그냥 한발자국만 더 나아갔으면 했는데, 조금 아주 조금만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뭐가 이렇게 어려운 건지 헛웃음이 난다.


나는 며칠 뒤면 한 살 더 나이를 먹을 테고, 분명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부족함을 곱씹어가며 부채감에 한동안 안절부절 못하겠지.


차라리 세상에게 뒤쳐지는 것이라면 그러려니 하겠건만 내 나이에 뒤쳐지자니 무섭고 서러울 뿐이다. 매해 벌어지는 나와 내 나이는 이제 좁혀볼 엄두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 하지만, 이대로 편히 가라고 놓아줄 생각도 없다. 밤을 새가며 방학숙제를 어떻게든 해가던 그때처럼, 여름인데도 일기장의 날씨가 어째서 매일 맑았는지 우스울 뿐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여전한 나는 이대로 내 나이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이런 부분에서 집요한게 이제는 좀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무섭고 서러운 일이라 해도, 어쩔 수가 없다고 해도, 뒷걸음질 치거나 발을 멈추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는 시합은 이제 더 바랄 수 없지만, 그래도 길 위에 덩그러니 나만 남겨질 수는 없다.


나이를 먹는 일은 무섭고 서럽다. 저만치 나이는 가는데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일은 무섭고 서럽다. 하지만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일을 상상하자니 그게 제일 무섭고 서러웠다.


그래, 그게 제일 무섭고 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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