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선
“나는 위로라는 건, 말로만으로는 좀 무리가 있다고 본다.” 아는 동생 하나가 사는 게 힘들다고 투덜거리길래 덜컥 속내가 튀어나왔다. ‘아차, 저질렀구나.’ 싶었지만 이왕 뱉어버린 말이라 주워 담기도 뭐해서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로 너를 위로하겠냐, 단지 버티고 견디고 힘내라는 소리밖에 해줄 것이 없어. 아니다, 힘내라가 아니라 힘내자가 맞겠다. 너도 나도.”
얼마 전까지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영화에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했다지. 어느 영화평론가는 지금의 젊은이들이 영화를 보며 위로를 얻었다고 했다. 또 다른 이는 사회부적응자들을 위한 영화라고까지 했다.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뒤늦게 영화를 보고서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다. 그는, 프레디머큐리는 누군가를 위로하고자 음악을 만들고, 노래를 불렀을까. ‘아니, 아니.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지.’ 내 멋대로 단정하자면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겠다 싶었다. 그는 그저 살기위해 애를 썼고, 조금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자신을 구원하는 일에 전념할 뿐이었다. 자신을 위해 애를 썼을 뿐인데, 그것을 제멋대로 내 위로로 삼는 것은 뭔가 허락 없이 훔치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저 자신을 위해 애를 쓰던 삶이 누군가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다니 말이다. 그런 건가 보다. 말뿐인 위로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나보다. 그의 인생을 다함께 반추하는 것으로 위로가 되다니 말이다. 어느 누군가가 흔들리고 바둥거리는 것만으로도 다른 누군가는 희망을 갖고 위로 받기까지 하는구나.
맞다. 치졸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다만, 그런 것도 같다.
얼마 전까지 여행을 하는데, 꼬마 여자아이가 공원에서 돈을 벌고 있었다. 돈을 번다고는 하지만, 그게 조금 애매하기는 한 것이 다른 아이의 그네를 밀어준다던지, 장난감 자동차에 타고 있는 아이들을 뒤에서 밀어주는 그런 일들.
그걸 보면서 나는 또 나쁜 버릇이 도졌다. ‘어느 아이는 부모가 애지중지 장난감 자동차에 탄 모습을 찍어주고 있는데, 그 자동차를 밀어주는 아이는 대체 어떤 기분이려나.’ 왜 그렇지 않나, 똑같은 아이인데 하나는 말끔히 옷을 차려입은 채로 자동차를 타고 있고, 한 아이는 돈을 벌겠다고 꾀죄죄한 모양새로 그걸 밀고 있다.
근데 한 십분쯤 보고 있다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차를 밀고 있는 꾀죄죄한 얼굴이 너무 해맑아서 내 뺨이 괜히 간지럽기까지 했다. 뭐랄까, 간단히 비관하지도 않고 쉽사리 좌절하지도 않는 그런 얼굴이었다.
사실, 나는 그전까지 공원에 앉아서 그 아이가 차를 밀며 공원을 서너 바퀴 도는 동언 주머니 속의 얼마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몇 푼을 쥐어준다고 저 아이의 인생이 바뀔까, 더 나아질까, 의미가 있긴 할까, 그리고 드는 제멋대로의 생각 ‘내가 저 아이의 지금 이 순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 해맑은 표정을 보니 내 오만함만 도드라졌다. 그 아이를 구원하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니었다. 내게는 그만한 힘도 없거니와, 그 아이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그 아이뿐이었으니까. 해맑은 표정으로 버둥거리는 그 말고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니 내 뺨만 뜨겁고 간질거릴 수밖에.
그리고 더 우스운 일은 아이가 몇 바퀴를 더 도는 동안 무심결에 내가 위로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간단히 비관하지 않고 쉽사리 좌절하지 않는 모습에 제멋대로 받아버린 위로였다.
나는 뭔가 잘못알고 있었는지도, 구원이라는 것도 위로라는 것도 전부 다해서 말이다. 누가 누군가를 구원하는 것도 위로하는 것도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닌 걸지도.
그간 나는 위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좀 더 욕심 부려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고작 내 미흡한 글재간으로는 무리라는 걸 알았으니까.
대신, 대신이라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그래도 대신에 이제는 좀 보여줄까 한다. 바둥바둥 거리면서도 간단히 비관하지 않는 모습을, 쉽사리 좌절하지 않는 모습도, 내 고민들을 끌어안고 때로는 컥컥거리면서도 스스로를 붙들어보겠다는 모습을 보여줄까 한다. 그것이 부디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그 누군가가 스스로를 구원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말이다.
해가 지자 공원바람이 차져 계속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아이에게 얼마를 쥐어줬다. 그냥 변덕이었다. 내 변덕이 아이에게 의미가 되기를 바라며, 푼돈을 얼마 쥐어줬다.
추신, 위로하지 말라는 건 아니지만, 그게 정말 위로가 될 지는 어떨지는 몰라. 그러니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그냥 하는 수밖에 없지 않나 싶어.